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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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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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량대안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 여기서 훈련대장 신관호가 창안제작한 수뢰포의 위력을 보기로 되여있었던것이다.
수뢰포는 적이 건너갈수 있는 강물속이나 바다속 또는 적함선이 정박하거나 지나갈수 있는 물속에 설치되여있다가 적함선이 가까이에 접근하였을 때 대기하고있던 군사가 수뢰포의 불심지에 불을 붙이는것으로서 폭파할수도 있었고 또는 적선의 부딪침에 의하여 스스로 생기는 불에 의하여 폭파할수도 있었다.
이 수뢰포의 위력에 대한 소문이 벌써 널리 퍼져 한양사람들뿐아니라 타곳의 사람들까지 도시락을 싸들고 새벽부터 한강가에 모여들었다.
최뚝에는 비단으로 둘러막고 비단채양까지 친 화려하게 장식한 관람석이 꾸려져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임금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앉아있을 처소였다.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지엄한 상감마마나 중전마마가 나타나기만 기다려 목을 빼들고있었다.
날씨도 초가을답게 하늘에는 목화송이같은 흰구름 몇점이 떠있을뿐 쾌청하였고 강녘은 하얗게 덮인 사람들로 흰눈이라도 내린듯싶었다.
사람들속에서 갑자기 《와!-》하는 함성이 터졌다. 임금 고종이 탄 보련과 명성황후가 탄 덩이 강변에 나타난것이다. 하지만 일산을 든 시녀들과 여러가지 기치들과 금빛, 은빛의 의장절월을 들거나 어깨에 총을 멘 엄엄한 시위군졸들에게 둘러싸이고 관복을 떨쳐입은 만조백관들이 뒤따르고있어 왕이나 왕비의 자태는 볼수도 없었다.
비단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관람석에 앉은 고종은 례식때에 입는 대례복인 붉은 면복을 입었고 머리에는 높은 운두우에 장방형의 관이 얹혀있는 면류관을 쓰고있었는데 관의 앞뒤로 오색이 령롱한 아흡개의 구슬줄이 주렴처럼 늘어져있어 여간만 화려하지 않았다.
고종의 곁에 큰머리에 왕비정장인 적의를 입고 앉아있는 명성황후는 좀 커다래진 눈으로 강대안에 하얗게 덮여있는 수만백성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이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자기가 이 억조창생의 머리우에 군림한 지엄한 국모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갈마쳤다. 하지만 다음순간 나라의 실제적통치자는 자기는 물론 국부인 고종도 아니며 고종의 부친이요 자기의 시아버지인 대원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고종의 오른켠으로 치우쳐 앞의 팔걸이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시샘에 가까운 눈초리로 여겨보았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의 가슴속에 정치적야심이 깃들었는지도 모른다.
강복판에는 커다란 낡은 전운선(쌀을 실어나르는 배.) 두척이 떠있었다.
국왕이하 조정의 모든 시원임대신들이 자리를 잡고앉자 대원군이 고종을 돌아보았다. 고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원군은 자기의 곁에 서있는 훈련대장 신관호에게 눈짓을 했다. 시작하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출전북소리가 《둥!-》, 《둥!-》강녘에 메아리쳐울렸다.
이윽고 병정들이 탄 거루배 두척이 강심의 전운선을 향해 노를 저어갔다. 드디여 거루배가 목표물인 낡은 전운선에 당도하였다. 병정들이 물에 뛰여드는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아니되여 번개의 불빛과 같은 강렬한 빛발이 번쩍하더니 《꽝!》, 《꽈르릉!》하는 뢰성과 같은 요란한 폭음이 강반을 진동시켰다. 이어 산산쪼각이 된 전운선이 공중으로 휘뿌려지고 강에 처박혔다.
불시에 만세의 함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감격과 환희에 겨워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얼굴에도 기쁨의 물결이 일었다.
대원군도 흡족하여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종이 주위사람들을 돌아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렇게 큰 배도 순식간에 깨버릴수 있으니 이제는 오랑캐들을 근심할게 뭐가 있겠소, 하하.》
이날 명성황후는 고종이 이처럼 통쾌하게, 이처럼 호탕하게 웃는것을 처음 보았다.
고종은 흡족한 기색으로 훈련대장 신관호를 불렀다.
《신대감, 어서 이리 오시오. 내 술 한잔 부어주리다.》
고종이 부어준 술을 명성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채로 신관호에게 주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머리를 숙여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감사를 표시한 신관호는 술잔을 단숨에 쭉 비웠다.
《역시 신대장은 호걸이요, 하하…》
고종이 다시금 통쾌하게 웃었다.
왕의 행차는 궁성으로 돌아왔으나 고종의 얼굴에서 웃음발은 시종 지워지지 않았다.
고종일행이 비원을 산책하고있을 때 급히 나타난 례조판서가 고종과 대원군을 잠시 갈마보더니 대원군에게 읍을 하고나서 아뢰였다.
《아뢰오. 방금 청나라례부(외교부)에서 통고해온바에 의하면 금년봄에 아라사(로씨야)군대라고 하면서 덕산군의 남연군묘(대원군부친의 묘)를 도굴하다가 도망친 서양오랑캐들이 실은 젠킨스란 놈을 두목으로 하는 미국놈들이 저지른짓이라 하옵니다. 이놈들을 뒤에서 조종한 놈은 상해주재 미국령사 월리암스란 놈이옵니다.》
대원군의 집권기간은 참으로 다난다사한 시기였다.
병인년인 1866년에 미국침략선 《셔먼》호가 살인과 략탈을 감행하면서 대동강으로 불법침입하였다.
그러나 증오에 넘친 평양성사람들의 용감한 투쟁으로 《셔먼》호는 대동강에 수장되고말았다.
이해 8월에는 7척의 군함에 2 500명의 군대를 싣고온 프랑스침략자들이 조약체결을 강요하면서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애국충정에 불타는 이 나라 군민들은 한사람같이 떨쳐나 결사항전으로 프랑스함대의 침공을 물리쳤다. 력사는 이 사변을 《병인양요》라고 전하고있다. 그런데 이태후인 무진(1868)년에는 일본이 저희들의 나라에서 도꾸가와막부정권이 무너지고 명치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알리면서 우리 나라와 새롭게 외교관계를 맺고싶다는 국서를 보내여왔다.
부산의 왜관훈도 안동준은 일본국서에 《천황》이니 《칙》이니 하는 오만한 문구가 있을뿐아니라 새도장을 찍은것을 비롯하여 외교관계에 위반되는 점들이 많다 하여 그것을 접수하지 않았다.
또한 이해에 미국은 젠킨스를 두목으로 하는 수백명의 국제무장단을 파견하여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유골을 훔쳐다가 그것을 미끼로 조선과 조약을 강요할 목적으로 충청도 덕산의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묘를 도굴하는 력사에 류례없는 범죄를 감행하였다.
례조판서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원군은 치를 떨며 분노하였다.
《불법무도한 미국오랑캐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 오랑캐족속들이기에 짐승같은짓만 저지르는거요?》
증오심으로 낯색이 벌겋게 상기된 고종이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이 순간 명성황후는 다른 대감들이 입을 열기 전에 자기가 고종의 앞에 나서야 한다는, 그래서 남편의 안중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신의 계시처럼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는 얼마전에 미국에 대한 책을 보아 그에 대해 자상히 알고있었던것이다.
명성황후는 고종을 정찬 눈매로 바라보며 말을 뗐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첩이 아는바에 의하면 미국은 아메리카대륙에 있는 커다란 나라옵니다. 독립을 공포하던 때까지 대서양연안 한쪽구석을 차지하고있던것이 원주민인 인디안들을 죽여버리기도 하고 린접한 나라들의 땅을 빼앗아 지금은 저들의 령토를 태평양연안에까지 확장하여 거의 중원(중국)만큼 큰 나라로 되였사옵니다.》
자기를 홀린듯이 쳐다보는 고종의 시선을 느낀 명성황후는 말을 이으며 조상궁에게 손짓했다.
《하여 미국은 태평양과 련결되여있는 우리 동양나라들에 눈독을 들이고있다 하옵니다. 이전엔 대서양과 인도양(인디아양), 태평양을 빙빙 돌아 아시아로 오던 미국은 직방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였으므로 태평양을 저들의 호수라 부른다 하옵니다.》
조상궁이 가져온 지도를 받은 명성황후는 그것을 고종의 앞에 펼쳐놓았다.
《세계지도옵니다.…》
《세계지도?…》
고종은 세계지도보다 명성황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명성황후가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세계지도의 여기저기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조선이고… 이것은 청나라… 여기는 아라사(로씨야)… 바로 이것이 미국이옵니다.》
고종은 뻔한 세계지도는 보지도 않고 황홀한 눈길로 안해 명성황후를 지켜볼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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