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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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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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심중에 커다란 충격을 준 예상찮은 일이 얼마후에 또 일어났다.
그날 명성황후는 창덕궁 서온돌의 자기 방에서 아침수라를 들고있었다.
젊은 궁녀들이 자개박이둥글상에 갖가지 료리들을 가져다놓았다. 그러면 기미상궁(검식상궁)이 저가락으로 그것들을 한점씩 맛본 후에 명성황후앞에 차려놓군 하였다.
명성황후는 긴 저가락으로 건강과 미용에 좋다는 료리들만을 집어 입에 조금씩 넣어 씹군 하였다.
젊은 궁녀들과 기미상궁까지 물러간 후에 조상궁이 명성황후의 귀가에 입을 바투 대고 뭐라고 수군거렸다. 명성황후는 저가락질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무어라?》
영문을 모르는 명성황후에게 조상궁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간밤에 리상궁이 생남하였소옵니다.》
순간 명성황후의 손에서 은저가락 한가치가 놋접시우에 떨어지며 쟁그랑! 아츠러운 소리를 냈다.
리상궁이란 국왕 고종이 총애하는 숙원 리씨를 의미한다. 그러니 그가 왕비인 자기보다 먼저 왕자를 낳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후두두 떨렸다.
그러나 다음순간 조상궁이 자기를 지켜보고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을 강잉히 다잡았다.
그는 상에 떨어뜨린 은저가락을 주어들며 짓눌린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뇌였다.
《경사로다.》
명성황후는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였다. 그는 좀전에 뜻하지 않게 저가락을 떨군 실수를 되새기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리석게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두번 다시 내 마음속을 드러내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가슴속에서 분통이 터져올라 식욕을 싹 잃고말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이 일을 어떻게 대할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꽉 차있었다.
투기는 《칠거지악》(녀자가 시집에서 쫓겨나는 7가지 잘못.)중의 하나로 려염집부녀들에게도 금물로 되여있다. 하물며 왕가에서, 더우기 국모로 불리우는 자기가 그런 감정을 조금이라도 나타내서는 절대로 안될것이다.
그는 자기가 먼저 국왕 고종과 귀인(왕의 첩의 칭호)으로 천거된 숙원 리씨를 축하해주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왕의 기쁨은 왕비의 기쁨이며 국왕과 왕비는 한몸이라는 자신의 높은 지체를 인상깊게 해줄수 있다고 생각했다.
먹는둥마는둥 수라상을 물린 명성황후는 거울앞에 앉아 화장을 고쳐하면서 자기자신과 자문자답을 계속했다.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높아 자기 속마음을 함부로 터놓는 성미가 아닌 명성황후는 왕비로 간택된 이후에는 더더욱 자기자신과만 이야기하는데 습관되여있었다.
얼마뒤 가슴과 어깨와 잔등에 다섯마리의 룡을 수놓은 와룡포로 화려하게 왕비정장을 한 명성황후는 손에 귀중품함을 든 조상궁을 데리고 산모가 누워있는 숙원당으로 향하였다.
조상궁이 들고가는 귀중품함에는 명성황후의 보물중에서도 제일 값진 귀중품이 들어있었다.
명성황후는 겉으로 애써 태연한 기색을 지었으나 심중에서는 격랑이 일고있었다.
왕비인 자기보다 후궁인 숙원 리씨가 먼저 생남하였다는 이 사실을 그는 도저히 인정할수도 용납할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해도 보지 않을수 없고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을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였다.
이렇게 며칠을 경황없이 보낸 그는 드디여 마음을 다잡았다.
후궁인 귀인 리씨는 시체말로 첩에 불과하지만 자기는 임금의 정실부인이라는 자각 그리고 리씨는 임금의 밤노리개에 지나지 않지만 자기는 임금을 협찬하여 국사를 돌봐야 할 국모라는 자부심, 더우기 젊은 자기도 왕자를 낳을수 있다는 자신심이 그로 하여금 불리한 정황을 강잉히 딛고넘어설수 있게 하였다. 이런 자각과 자부심과 자신심으로 하여 그는 독수공방에서 공방살이를 해야 하는 그 길고 많은 밤의 외로움과 고독함과 서글픔을 이겨낼수 있었다.
지금은 귀인 리씨에게 빠져있는 남편 고종의 마음이 언젠가는 자기에게로 돌아서리라는 기대를 안고 명성황후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밝은 와룡초불아래서 책장을 번지군 하였다.
고독한 명성황후의 말동무가 되여주군 하는 양오라비 민승호가 하루는 서양그림책을 보고있는 명성황후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전마마, 조정의 대감들이 우리도 신식보총이나 대포를 사와야지 경복궁중건에만 돈을 다 써버리면 어쩌겠는가고 하옵니다. 그뿐이 아니외다. 여하튼 대원위께서 페정개혁을 너무 과도하게 내민다고 의론이 분분하옵니다.》
창호지에 꿰비쳐들어온 락조에 얼굴이 붉게 물든 명성황후는 민승호의 말이 리해되지 않는듯 미간을 쪼프렸다.
《그런데 왜 대원위께 말씀드리지 못한대요?》
그러자 민승호가 덴겁하여 뒤로 물러나앉았다.
《대원위대감께선 호랑이 한가지여서 입 잘못 벌렸다간 죽기가 십상이오이다.》
명성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대원위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요. 이양선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드니 그 오랑캐들때문에 시아버님 뇌심초사 여북 자심하시겠소.》
민승호가 머리를 숙였다.
《황송하오이다.》
《아버님께 내가 품해보겠소.》
귀인 리씨일로 하여 그간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시어머니인 민부대부인에 대해서조차 까맣게 잊고있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가 운현궁을 찾은 날은 하늘이 높아지고 쾌청한 날이였다.
오래간만에 궁성을 벗어나 항간에 나온 그의 마음은 푸른 하늘처럼 활짝 트이는것만 같았다.
앞에 단정히 앉아있는 명성황후를 민부대부인은 정찬 눈길로 바라보았으나 대원군의 눈에는 어딘가 경계하는 빛이 어려있었다.
명성황후가 데리고 나온 시녀들이 대원군과 민부대부인앞에 감과 귤이 담긴 커다란 참대광주리를 하나씩 들여다놓았다.
《이것은 풍기감이고 이건 제주귤이옵니다.》
며느리의 공손한 말에 부대부인은 감읍하여 코멘소리를 했다.
《중전이 이런 사려까지…》
대원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대원군에게 명성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 조정의 중신들이 경복궁중건에만 국고금을 쓰지 말고 다른 나라에서 정예한 병기를 사와야 한다고…》
《으음?!》
눈길을 치뜨는 대원군의 거벽스러운 태도에 대뜸 기가 질려버린 명성황후는 말을 중둥무이하고 머리를 숙였다.
며느리 명성황후의 말을 듣는 이 순간 흥선군 리하응은 웬일인지 불쑥 대원군이 되기 이전의 일들이 병풍의 그림을 보듯이 뇌리에 선명히 되새겨졌다. 세상을 기이기 위해 파락호(난봉군)행세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불운한 그 시절, 조금이라도 똘똘한 왕족들은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세도 안동김가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목숨이나 부지하려면 바보구실, 거지구실, 투전군구실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불상놈들과 어울려 뒤골방에서 투전을 하고 술청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취하여 도랑창에 구겨박힌적은 그 몇번이였으며 김무슨근 김병무엇하는 세도김가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뜰아래에서 하정배를 하고 돈천이나 쌀을 구걸한적은 또 그 몇번이였던가. 하여 그는 《막걸리대감》, 《거지흥선군》이란 별호를 늘 잔등에 지고 다녔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본태가 아니였다. 피눈물을 씹어삼키던 그 나날 파락호는 그의 외형이였을뿐 내심에서는 언제건 자기도 득세할 날이 있으리라는 간절한 열망, 대망이 한순간도 사그라지지 않고 잉걸불마냥 이글거렸다.
이런 리하응이였기에 그는 대원군이 되여 나라의 정무대권을 틀어쥐게 되자 눈꼴 신 안동김가들의 세도통치를 일거에 쓸어버리고 기울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한 《페정쇄신》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왕권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임진왜란때 타버린 후 근 300년간이나 페허로 있던 경복궁을 웅건장중하게 일떠세웠으며 문란해진 봉건적수탈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탐관오리들을 처벌하는 한편 지방유생들과 토호들의 소굴인 서원을 철페해버렸다.
대원군은 대외관계에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나라의 문을 닫아매고 쇄국하는 길만이 봉건적지배를 유지하며 봉건국가를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적극적인 양이정책(서양배척정책)을 진행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대내외정책에 대해 반대파들이 반발해나섰지만 고집이 센 그는 자기의 《주견》대로 《개혁》을 과감히 밀고나갔다.
구데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랴 하는것이 그의 배짱이였다.
그런데 어린 며느리 명성황후가 이런 그의 사정을 알기나 하겠는가.
이윽하여 대원군은 엄한 눈길로 명성황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중전의 그 마음 가상하외다. 허지만 지금 훈련대장 신관호대감이 그 어떤 이양선도 까부실수 있는 수뢰포를 창안중에 있으니 중전도 보게 되리라.》
《그렇습니까?》
명성황후의 낯색이 밝아졌다.
대원군이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리구 경복궁중건문제로 말하면 중전도 왕실의 한사람이로되 마땅히 왕권을 두터이해서 이 나라의 존엄을 보여야 할게 아니겠소. 그러니 중전은 나라의 정사에 일체 참견하지 말고 차례지는 만복이나 누리도록 하시오. 음.》
밝아졌던 명성황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가 운현궁을 나선 뒤 대원군과 부대부인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갔다.
《대감, 중전이 영특하지요?》
《영특하다?…》되뇌이고나서 대원군은 혼자소리마냥 중얼거렸다.
《지금은 암고양이로되 장차 암범이나 되지 않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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