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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1-3. 경박호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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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282회 작성일 15-05-27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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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박호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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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대륙의 으뜸가는 명승지 경박호의 남쪽호반에는 남호두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남호두란 호수의 남쪽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호수의 북쪽호반에 있는 마을은 북호두라고 부른다. 호수로 흘러드는 소자지하물줄기를 따라 상류쪽으로 몇십리 올라가면 깊은 계곡의 어느 한 산탁에 낡은 귀틀집 두채가 있었다. 그 집의 한채가 바로 1936년 2월에 우리가 회의장소로 사용한 집이였다.


지금은 초목에 묻혀 집터자리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였다지만 오륙십년전에는 그 귀틀집앞에 커다란 쇠스레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한그루씩 서있어 회의장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표적으로 되였다. 1930년대 후반기 력사의 시원지가 다름아닌 우리 나라 력사가들이 《소자지하의 귀틀집》이라고 부르는 그 집이다.


우리가 2차 북만원정이라고 부르는 또 한차례의 원정을 끝마치고 그 고장으로 향한것은 1936년 2월중순 립춘도 지나고 우수를 맞이한무렵이였다. 절기를 따지면 봄이 시작된셈이지만 북만의 혹한은 여전히 기광을 부리며 사나운 대륙풍으로 우리를 후려갈기였다. 경박호에서는 이따금씩 얼음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소자지하의 밀림속에서는 참나무, 박달나무들이 얼어터지는 소리가 쩡쩡 울리였다. 그고장 혹한이 어찌나 심했던지 한다하는 작식대원들조차 한지에서 밥을 짓는 날은 설구지 않는적이 거의 없었다. 밑굽의 쌀은 새까맣게 타도 령하 40도의 강추위를 이겨내지 못하는 웃층은 끓지 않아 식어버리고마는것이다. 북만은 나의 일생에서 선음식을 가장 많이 먹은 고장으로도 인상이 깊다.


항일대전의 첫 총성이 울린 때로부터 어언 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때였다.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크게 장성하였고 투쟁의 전망도 락관적이였다. 파란과 역경을 헤쳐온 항일혁명은 분명 새로운 전환기를 향하여 힘차게 줄달음치고있었다.

원정을 종결짓고 겹쌓인 로독을 풀사이도 없이 위증민과의 상봉장소로 내정되여있는 남호두를 향해 발걸음을 다그치는 나의 마음은 혁명의 장래에 대한 천갈래만갈래의 생각으로 하여 실로 착잡하고 번거로왔다.


나는 북만원정의 전기간은 물론이고 원정을 마친 다음 소자지하에 가있으면서도 반년전에 모스크바로 떠나간 사절들을 학수고대하였다.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위증민이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되여있는 기본문제는 현상적으로는 동만에서 수천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였던 《민생단》문제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조선혁명의 주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할수 있었다. 다시말하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합법적인가 비합법적인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는가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것이였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놓고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약관화한것이지만 국제공산당이 존재하였고 1국1당제원칙이 불가역적인것으로 되여있었던 당시로서는 어느 견해가 옳고 어느 견해가 그르다고 가볍게 판정할수 없는 복잡하고 심각한 난문제였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운명문제이기도 하였다.


1국1당제원칙을 휘두르며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드는데 대하여 공산주의자답지 않은 이단행위이며 비당적분파행위라고 걸고드는 사람들의 지론은 아주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것이였다.

공산주의자란 곧 국제주의자인데 어떻게 협애한 민족주의 리념에 사로잡혀 자기가 당적을 붙이고있는 나라의 혁명에 모든것을 다 바칠 생각을 하지 않고 당조차 없는 고국생각에 골몰할수 있는가, 그것은 제2국제당시기 《조국방위》의 간판을 들었던 수정주의자들과 같은 립장이다, 레닌은 일찌기 《조국방위》론자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배신자로, 원쑤로 락인하고 규탄하였다, 당신들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론을 계속 주장하게 되면 사회주의의 배신자로, 원쑤로 락인될수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위증민이 가지고올 결과를 대체로 짐작하고있었다고도 말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제기한 문제가 정당하였고 또 그 문제에 대하여 위증민도 충분한 인식과 리해를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나는 국제당에 있는 일군들이 조선혁명의 근본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제소에 응당 긍정적으로 대답해줄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국제당이 우리의 고충을 진리의 편에 서서 공명정대하게 해결해줄것이라는 나의 확신은 우리가 위증민을 통하여 모스크바에 제소한 문제점들이 어느 모로 보나 혁명적원칙과 혁명의 리익에 부합된다고 변함없이 믿어온데도 있었지만 국제당이 새로운 로선을 추구하고있었던 당시의 사정과도 적지 않게 관련되여있었다.


레닌에 의하여 국제공산당이 조직되던 1919년만 해도 집권한 로동계급의 정당은 오직 로씨야공산당밖에 없었다. 제2국제당의 수정주의적인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혁명적인 좌익이 떨어져나와 공산당들을 조직하고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아직 조직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미숙하였고 자기 나라 혁명을 자기 힘으로 맡아할만한 력량으로까지는 자라나지 못하였다.


로씨야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후 전세계적범위에서 자본의 철쇄를 끊어버리고 쏘베트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투쟁이 하나의 시대적흐름으로 세차게 벌어졌으나 응당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였다. 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사회주의국가의 출현이라는 유리한 객관적정세에도 불구하고 매개 나라의 주체적혁명력량은 적들을 압도하고 최후승리를 달성할수 있으리만큼 완벽하게 준비되지 못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앞에 신생로씨야와 로씨야공산당을 축으로 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재편성하고 조직적으로 결속할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우게 하였으며 국제공산당의 조직형식과 활동방식에서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을 세우며 매개 나라의 당과 혁명운동이 국제적중앙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할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일부 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자기나라 혁명의 목적과 민족적리익을 떠나 모스크바바람에 덮어놓고 추종하는 사대주의적인 경향이 발로되였는바 이런 경향으로 하여 각국의 혁명운동은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다.


그러나 국제당의 통일적인 지도밑에서 각국의 혁명운동은 발전하였고 매개 나라들에서의 혁명력량도 장성하였다.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독자적으로 맡아 수행할만한 력량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초엽부터는 아세아의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도 공산당들이 련이어 출현하였고 그 당들의 령도밑에 민족해방투쟁도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 많은 나라 당들의 발언권이 서게 되고 자기 당의 로선을 자주적으로 결정하려는 요구가 높아지게 되였다. 국제공산당이 모스크바에 앉아서 세계혁명의 운전대를 틀어잡고 여러 대륙에 널려있는 나라들의 구체적실정에 맞는 처방을 제때에 내리거나 천변만화하는 정황과 조건에 맞게 그 나라들의 혁명투쟁을 조종하고 지도한다는것도 기실은 어려운 일이였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련합으로 조직된 국제당은 로선과 정책을 작성하고 시달하는데서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세계적인 범위에서 혁명력량을 조직하고 투쟁을 발전시켜나가는데서 그 조직형식과 지도방식을 서서히 바꾸는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되였다. 혁명은 수출입에 의하여 진행되는것이 아니라는 사정과 매개 나라의 혁명력량을 하나로 굳게 묶어세워야 할 절박성은 각국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로선작성과 집행에서 주체를 세우고 자기 당의 독자성을 견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천된 정세는 국제당이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확인해줄수 있는 중요한 담보로 되고있었다.


위증민은 1935년 여름에 훈춘쪽으로 해서 쏘련으로 들어갔는데 나올적에는 할빈이나 목릉을 거쳐서 녕안에 나와 나를 만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액목원정을 마치자 녕안행을 하게 된것이다.


우리가 남호두에로의 걸음을 다그치고있던 그 시기를 전후하여 국제무대에서는 파시즘의 위험성이 날로 증대되고있었다.

에스빠냐내전은 파쑈들의 로골적인 무력간섭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띤 열전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동방에서는 일본렬도가 새 전쟁의 온상으로 번져갔다. 일본의 군국화는 시시각각으로 가속화되였다. 1932년 《5.15사건》에 이어 사이또내각의 성립으로 정당내각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군부내각시대를 맞이한 일본땅에서는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이고 문화의 어머니》라고 찬미하는 열기띤 말마디들이 아무 꺼리낌없이 전세계를 향하여 란사되고있었다.


일본에서의 파쑈화추세는 우리가 남호두회의를 하기 직전인 1936년 2월 26일의 사건으로 극한점에 이르러 마침내 소장파군부의 해외침략론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하는 숨가쁜 국면을 빚어냈다.

반란에 참가한 청년장교들과 1, 000여명의 하사관, 병사들은 수상이하 여러 대신들의 관저를 습격하여 내대신, 장상, 교육총감, 시종장 등의 정부요인들을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고 경시청, 륙군성, 참모본부, 륙상관저를 점거함으로써 이른바 《일본정치의 심장부》를 제압하였다.


《존황토간》의 구호밑에 일어난 무장반란은 나흘만에 진압되고 주동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것으로 정국은 수습되였지만 이 사건은 일본군국주의발호의 위험신호로 되였다.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으로 나타난 일본군부계층들간의 알륵의 산물로 평가되고있는 《2.26사건》은 일본에서의 파쑈화, 군부독재에 의한 군국주의체계확립이 얼마나 엄중한 단계에 이르고있는가를 실증해주고있었다. 일본국내에서의 군국주의세력의 준동은 새로운 전쟁과 보다 큰 규모의 군사행동으로 발전할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있었다.


우리는 일본에서의 이 사태발전을 높은 경각성을 가지고 주시하였으며 거기에서 생길수 있는 후과를 예상하면서 우리의 투쟁전략을 재검토하였다. 반란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것은 일본군국주의가 국내정치생활에 얼마나 횡포하게 참여하고있으며 대외침략의 길을 닦기 위해 얼마나 발광하고있는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사실 일본은 그때로부터 1년반이 못되여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보다 큰 침략의 길로 줄달음쳐나갔다.


일본의 파쑈화는 식민지 조선의 질식도 가속화시켰다. 조선반도에서는 모든 조선적인것을 말살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운동과 반일적요소들까지 전멸시키기 위한 광란적인 대섬멸전이 벌어졌다.

일본어를 쓰지 않고 조선말을 하는것, 색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는것, 《히노마루》를 게양하지 않는것,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것,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지 않는것, 심지어는 게다를 신지 않는 현상까지도 반일, 반역, 반국가 행위로 범죄시하면서 벌을 주고 벌금을 물리고 붙잡아가고 가두어넣었다.


민족멸살의 무시무시한 대풍랑속에서 량심의 마지막쪼박마저 잃어버린 어제날의 애국지사들은 목숨이라도 살려보자고 《동조동근》과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반역의 길을 걸었다.

애국은 죽어가고 매국만이 살판치던 세월이였다. 조선은 통채로 죽어가고있었다.

조선이 죽어가고있다는 이 기막힌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백두산에 나가서 조선은 살아있다, 조선은 싸우고있다, 조선은 반드시 살아난다는것을 실증해주지 않으면 안될 가장 절박한 리유로 되고있었다.


남호두회의를 전후한 시기 국제국내적으로는 이처럼 충격적인 변화들이 련달아 일어나고있었다.

이러한 국제적사변들이 우리에게 커다란 중압감을 주었던것만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나는 장차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게 되면 얼마든지 일제를 타승할수 있을것이라는 신심을 가지고있었다.


행군은 고되고 로독도 이를데없이 심하였으나 가까운 장래에 있게 될 백두산지구진출의 날을 눈앞에 그려보는 대원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우리가 경박호에 깃들어있는 진주문마을의 전설을 들으면서 그 전설이 보여주고있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가지고 론쟁을 한것도 남호두로 갈 때였다고 생각된다. 그 전설의 줄거리가 아주 재미있는 내용으로 엮어져있었다.


경박호기슭의 진주문이라는 마을에 가난한 아버지와 딸이 살고있었다. 20살전야의 딸은 경국지색이라고 불리울만큼 미모가 뛰여난 처녀여서 아근의 총각들은 누구나 그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고싶어하였다.

그런가 하면 처녀의 아버지는 천길물속이라도 꿰뚫어볼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있었다. 어느날 그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전날 낚시질을 하면서 보니 호수의 깊은 물속에 금거울이 갈앉아있더라. 그 금거울을 꺼내오자면 물밑에 있는 대가리가 세개 달린 괴물을 없애야 하는데 그런 거사를 하자면 아주 용감하고 담이 큰 방조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 방조자가 됨직한 인물을 물색하지 못해 요즘 이 아버지는 며칠째 궁리를 하는중이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그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를 도와서 금거울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는 총각이 있으면 나는 그런 총각에게 시집가겠어요.》


딸의 발기는 아버지의 지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딸의 의사가 여사여사하다고 린근마을들에 소문을 돌리였다. 그 소문을 듣고 숱한 총각들이 진주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처녀의 아버지에게서 금거울을 끌어올릴 계획이 어떠어떠하다는 말을 듣고서는 누구도 방조자가 될 용기를 감히 내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양가성을 가진 한 젊은이가 나타나 방조자가 되겠다고 자청해나섰다. 아버지와 딸은 즉석에서 그 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그리고 금거울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면 사위로 맞아들인다는 언약까지 하였다.

구름 한점 없는 맑게 개인 어느날 아버지는 양총각과 함께 호수에 나갔다. 배를 호수우에 띄운 로인은 대형, 중형, 소형으로 된 세개의 검을 젊은이에게 주면서 《내가 첫번째로 물우에 떠오를 때 자넨 나에게 제일 작은 검을 주어야 하네. 두번째로 떠오를 때는 중간검을 주어야 하고 세번째로 떠오를 때는 대검을 주어야 하네. 그러되 검을 줄 때는 그 손동작이 번개같이 날래야 하네. 겁을 먹어선 안되네. 금거울을 꺼내오기전에 중도에서 겁을 먹고 도망치면 내 목숨은 말할것도 없고 자네 목숨도 없어지고마네.》

총각은 《아버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하고 로인을 안심시키였다.

로인은 곧 물속으로 뛰여들어갔다.


총각은 배우에서 물속을 들여다보고 처녀는 호반에서 총각을 주시하였다. 잠시후 로인의 창백한 얼굴이 불쑥 물우에 떠올라왔다. 총각은 약속대로 소검을 늙은이에게 넘겨주었다. 로인은 그 검을 받아가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호수의 심층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로인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머리만한 괴물의 대가리를 들고 물우에 나타나 두번째로 검을 받아쥐고 재차 물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수면의 물결이 갑자기 높아지고 배가 뒤집힐듯한 풍랑이 일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로인이 이번에는 말대가리만한 괴물의 목을 잘라가지고 올라와 총각의 손에서 세번째 대검을 받아쥐고는 또다시 사품치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늘에서는 우뢰가 일고 호수우에서는 격랑이 끓어번지였다. 총각이 탄 배는 그 격랑우에서 당장 물에 처박힐듯이 아슬아슬하게 기우뚱거리였다. 호반의 처녀는 그 무시무시한 광경앞에서 간이 마르고 심장이 멎을것 같은 긴장을 느끼며 손에 땀을 쥐고 안절부절 못하였다.


정신착란을 일으킨 젊은이는 로인과의 언약도 저버리고 호반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처녀에 대한 미련도 다 집어던지고 호수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나갔다. 격노한 호반의 처녀는 발을 구르며 총각을 욕질하다가 그를 설복하여 배머리를 호수복판으로 돌리게 하고는 자기도 총각과 함께 배를 타고 아버지를 찾았다. 바람도 자고 격랑도 잠들었으나 아버지의 형체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처녀와 총각이 목청을 합쳐 안타깝게 부르고 또 불렀건만 수중고혼이 된 아버지는 그들의 피타는 절규에 호응할수 없었다.

처녀는 눈물을 흘리며 배우에서 언약을 어긴 총각을 꾸짖었다. 하지만 말다툼에 시간가는줄 모르던 두 젊은이의 모습도 얼마후에는 안개속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액목에서 말하는것이 다르고 녕안에서 말하는것이 다른 식으로 지방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지만 전설의 줄거리는 대체로 이러하였다. 짐작컨대 경박호란 호수의 이름도 진주문의 전설에서 유래된것 같다. 전설은 우리로 하여금 의리와 희생성이라는 두가지의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우리 동무들은 그때 총각을 의리가 없는 비겁한놈이라고 욕하였다. 이 전설이 남긴 여운이 대단히 컸다. 빨찌산대원들은 후날 대렬내에서 비겁분자가 생길 때마다 《경박호의 양총각 같은놈》이라고 규탄하였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조국의 운명, 민족의 운명이 우리들앞에 제기하고 있는 당면한 력사적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대책들을 취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들을 토의하고 결정짓기 위하여 나는 백두산으로 떠나기전에 먼저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모스크바에 간 사절들을 기다리면서 회의에 제기할 보고서초고를 거의 끝내가고있던 2월중순의 어느날 저녁무렵 기척도 없이 귀틀집문이 벌컥 열리더니 위증민이 불쑥 내앞에 나타났다.

몇달동안 입원치료를 받느라고 예정보다 늦게 돌아왔노라고 하면서 그는 퍼그나 미안해하였다. 비록 예정기일은 초과하였지만 그가 병약한 몸을 추세워가지고 만주로 돌아온것은 축하할만한 일이였다. 모스크바바람을 쏘이고나서 그런지 몸이 퍽 충실해진것 같았다. 아직은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겉모습과 여유작작한 표정만 보고서도 그의 모스크바행이 좋은 결실을 가져왔을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위증민의 귀환로정이 순탄치 않았다. 그는 철도로 할빈을 거쳐 녕안에까지 와서 주보중의 5군동무들을 만나본 다음 남호두로 오다가 만구부락근처에서 순찰중에 있던 경찰들에게 걸려들었다. 몇마디의 심문끝에 상대를 수상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경찰은 그를 자기네 분서로 끌어가려고 하였다.위증민의 보따리속에는 국제당에서 받은 중요문건들이 들어있었다. 끌려만가면 만사가 끝장날판이였다. 그는 돈 50원을 경찰의 손에 쥐여 주고 무사히 풀려나왔다.


위증민은 자기 몸값이 몇만원쯤 되는줄로 알고있었는데 50원밖에 안되더라고 하면서 롱을 하였다.

위증민은 별스럽게도 나에게 새삼스러운 악수를 청하였다.

《김일성동지, 그 손을 다시한번 잡아봅시다.》

순간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방금전에 악수했는데 또 무슨 악수입니까?》

《축하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이 악수는 의의있는 악수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김일성동지, 국제당에서는 동지의 제소를 받고 그것을 심중히 토의한 끝에 제기된 모든 문제들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결론을 짓고 그를 지지하여 중대한 몇가지 지시를 내리였습니다. 모든 일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소망대로 되였습니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드는것을 느끼며 위증민의 두팔을 덥석 끌어당기였다.

《그렇습니까!》

《예, 국제당은 반〈민생단〉투쟁문제를 비롯해서 동만당의 일부 활동에서 엄중한 좌경적실책이 있었다는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당의 책임일군들로부터 거기에 가있는 중공당대표부 일군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견해를 표시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을 직접 책임지고 수행하는것이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수 없는 신성한 권리라는것을 국제당이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국제당은 앞으로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중국혁명을 하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을 맡아하도록 책임을 서로 분담할데 대하여 명백한 결론을 주었습니다.》


위증민은 왜서인지 한동안 말끝을 잇지 못하였다.

나는 그가 무엇인가 심중한 자책과 회오에 잠겨있음을 간파하였다. 서로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피력하던 지난날의 격론을 돌이켜보는것일가, 다홍왜와 요영구의 회의장들에서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론난을 겪어왔던가, 그리고 회의장밖에서는…

그런데 위증민의 모스크바행으로 하여 그처럼 복잡한 문제가 우리의 소망과 념원대로 순조롭게 풀리게 된것이다.


위증민의 모스크바행과 관련한 일부 자료들에 의하면 그가 국제당 7차대회에 참석한것이 아니라 학습시찰을 목적으로 지방당단간부 10명을 대동하고 훈춘에서 떠났으며 그의 주요임무는 국제당주재 중국대표단에 《민생단》문제를 보고하는것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자료들이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그가 국제당 제7차대회에 참석했다는 자료가 지금도 국제당문헌고에 엄연히 남아있다.


위증민은 자기가 모스크바에 가서 만주에서의 빨찌산투쟁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국제당에 제출하였다고 말하였다. 그가 국제당에 제출한 보고는 《풍강보고》라는 제목으로 되여있다. 그는 모스크바에 가서 위증민이라는 본명외에 풍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된 문제와 관련된 자료들에는 서로 엇갈린 견해들이 기록되고있다. 어떤 자료들에는 그 극좌의 주되는 책임이 위증민에게 있다고 씌여있으며 그와 반대로 어떤 자료들에는 그가 동만특위 서기로 파견되여온 다음부터 반《민생단》투쟁에서의 편향이 바로잡히게 되였다고 지적되여있다.


나는 반《민생단》투쟁의 모든 해독적후과에 대한 책임이 다 위증민에게 있다고 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여 1934년 겨울 위증민이 할빈시당 서기로 있으면서 성위 순시원으로 동만에 파견되여왔던 초시기 《민생단》문제와 같은 복잡한 사태에 그가 매우 당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해한것만은 사실이다. 그 당시 그는 혁명조직과 유격대안에 《민생단》이 많이 박혀있고 따라서 그것을 철저히 숙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기성의 사고방식에 적지 않게 매달려있었다. 후에 말하기를 그는 처음에 대부분의 조선사람이 다 《민생단》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실토하였다.


위증민이 국제당에 가서 우리에 대하여 보고한 자료를 놓고보아도 그의 말은 대체로 진실인것 같다.

《김일성, 조선인. 용감하고 적극적이다. 중국어를 잘한다. 빨찌산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대원들속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구국군속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어쨌든 위증민은 초기의 이러저러한 오유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까지 가서 《민생단》문제와 관련한 국제당의 결론을 받아가지고왔으니 그가 숙반투쟁에서의 극좌적오유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는것이 정확할것이다. 사실 그는 다홍왜회의때에도 《민생단》문제와 관련한 나의 립장에 리해를 표시하였다.


그가 민족관념을 초월하여 국제당에 동만의 실태를 정확히 보고하고 우리에게 리롭도록 만사를 원만하게 해결해가지고 돌아온것은 고마운 일이였다.

《고맙습니다. 국제당도 고맙고 특히 우리를 위해 병약한 몸으로 모스크바에까지 가서 수고해준 위증민동지가 더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되는 나의 인사였다.

위증민은 과분한 칭찬이라고 하면서 몹시 게면쩍어하였다.

《동만특위와 그 산하의 우리 중국인공산주의자들이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면서 문제를 편협하게 보고 사람들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처리한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애매하게 피해를 보았습니다.

반〈민생단〉투쟁을 공명정대하게 진행하지 못한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나도 큰 책임을 느끼고있습니다.

국제당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나는 위증민의 말을 진실한 자기반성으로 받아들이였다.

《로위, 공산주의자들도 인간인데 왜 실책을 범할 때가 없겠습니까. 나는 〈민생단〉문제가 복잡하게 된 근본원인을 일본놈들의 민족리간책동에서 찾고싶습니다.》

《옳습니다. 결국 우리가 적이 던진 계책에 한동안 빠져서 골육상쟁을 벌린셈이지요. 제편끼리 해칠내기를 했으니깐…》

위증민은 《내가 동만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이 간도땅을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도로 먹을 생각을 하고있다고 말입니다. 필시 일본놈을 등에 업고 간도땅을 차지하려 할터이니 철저히 경계하라고 했지요. 내가 처음에 그 말을 좀 믿었던것 같습니다.》 하고 허구프게 웃었다.

위증민의 얼굴을 쳐다보는 나는 어딘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로위, 만사가 다 좋게 풀렸는데 지난날의 일들을 더 생각하지 맙시다. 솔직히 말하여 로위를 국제당으로 전송할 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참으로 무거웠댔습니다. 그러나 나는 로위가 우리의 제의를 성근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국제당에 책임적으로 전달하겠다고 언명했을 때 그 성실성을 믿었더랬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국제당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드는것은 죄로 되지 않는다는것과 그것은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응당히 분공주었어야 할 신성한 의무이며 1국1당제원칙으로도 뺏아낼수 없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당당한 권리라는데 대해서도 명백하게 결론하였다.

우리는 조롱속에 갇혔다가 놓여난 새처럼 마음껏 창공을 날수 있는 광활한 자유를 선사받은듯한 심정이였다. 우리에게는 전에 없던 날개가 생긴셈이였다. 날개가 생긴 이상 조선혁명은 급속히 상승비행할수 있는 전망을 가지게 되였다.


위증민은 국제당 제7차대회의 전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전달해주었다.

당시 국제공산당앞에 나선 초미의 과제는 파시즘을 반대하는 투쟁을 세계적판도에서 강력하게 벌리는것이였다.

제1차 세계대전후 이딸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고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파시즘은 많은 구라파나라들에서 음산하고 불안스러운 정치적변동을 가져왔고 인류의 머리우에 새로운 전쟁의 구름을 몰아왔다. 이딸리아의 무쏠리니에 의해 조직된 《국민파시스트당》으로부터 시작된 파시즘은 독일의 히틀러와 그에 의하여 조직된 나치스당에 의해 극치를 이루었다.


파시즘은 극단적인 민족배타주의를 고취하였는바 이것은 독일이 새로운 세계대전을 일으킬수 있는 화근으로 되였다. 파시즘이 안고있는 극단한 반공심리는 반유태인주의와 결합되면서 그때까지 존재한 고금동서의 모든 반동사조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하고 해독적인 사조로 되였다. 파시스트는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치생활에서 무시할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였다.


독일대부르죠아지는 히틀러와 같은 파쑈독재자의 강력한 주먹만이 독일이 겪고있는 모든 위기를 극복할수 있으며 공산주의를 제압하고 독일제국의 새로운 중흥을 이룩할수 있다고 보았다.

히틀러파시스트는 권력을 탈취한후의 첫 사업으로 독일공산당을 반대하는 모략에 달라붙었다. 온 세상을 경악케 한 악명높은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은 이 모략에 의해 연출된 희세의 광대극이다.

국회의사당을 방화하면서 히틀러나 게링그가 노렸던 정치적목적은 수치스러운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물론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비법화하고 국회자체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기는 했지만 세계의 면전에서 가장 반동적이고 로골적인 부르죠아정치체제로서의 파시즘의 정체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놓았다.

독일파시스트는 세계의 면전에서 도발자, 독재자, 전쟁방화자로 락인되였다.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강화는 진보적인류를 각성시키였다.


파시즘의 대두와 새 전쟁위험에 직면하여 국제공산당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렬을 막고 통일적인 보조로 파시즘에 대항하는것을 중요한 전략적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이리하여 국제적으로 반파쑈인민전선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게 되였다.

동방피압박민족들과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의 반파쑈인민전선운동은 제국주의침략에 대처하여 모든 민족적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한 반제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나타났다.

국제공산당 제7차대회는 바로 이러한 전략적목적을 걸고 각국 공산당들이 모든 반파쑈력량과 반제력량을 결속할것을 요구하였다.


위증민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투쟁을 국제적범위에서 강력히 벌릴데 대한 지미뜨로브의 보고가 아주 인상적이였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경애감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는 세계의 이목과 진보적지성이 지켜보던 라이프찌히공판의 주인공 지미뜨로브를 당대의 거인이라고 생각하였다. 파시즘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할데 대한 그의 호소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진보적인류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쏘련사람들인 지노비예브나 부하린, 마누일스끼를 대신하여 벌가리아사람인 지미뜨로브가 국제공산당의 수위에 선것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고있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형편을 그대로 반영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국제당의 활동이 독자적인 매개 공산당들의 활동에 립각하여 진행되게 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있음을 시사하는 산 실례로 된다고 말할수 있었다. 국제당 제7차대회가 자기 결의에서 매개 당들의 독자적인 활동을 상당한 정도로 허용하였던것은 이러한 시대적요구를 반영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대회가 조선혁명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권리와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한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위증민의 귀환보고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 위업의 정당성, 우리 로선의 정확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게 가졌다. 위증민은 《만주에서의 반제통일전선에 대하여》라는 양송의 기사가 실린 국제공산당 기관지 《공산국제》와 국제공산당 동양부에 있는 왕명, 강생이 련명한 국제공산당에서 길동지구 책임일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나에게 주면서 여기에 조선에 대한 국제당결정의 기본부분이 다 해설되여있다고 하였다.


양송은 자기의 글에서 좌경기회주의적오유를 극복하고 반일통일전선을 시급히 수립할것을 제기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이제 중, 조, 몽, 만 피압박민족의 통일전선이라는 구호를 내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중조민족은 굳게 련합하여 일본의 괴뢰만주국통치를 전복하고 간도조선인민족자치주를 건립하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중조반일련합군에 망라되여 활동하면서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게 할데 대하여서도 강조하고있었다. 양송이란 내가 1차 북만원정때 주보중의 산막에서 만나보았던 국제당파견원 오평을 말한다.


국제당에서는 우리들에게 단순한 정신적지지, 로선상의 지지만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앞으로 조선혁명을 힘차게 떠밀고 나가는데 도움이 될수 있는 몇가지 대책적인 안까지 주어 행동상 지지도 표시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까지 련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해왔던 반일유격부대들을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갈라 재편성하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이 문제로 말하면 사실상 조선혁명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책임과 권리에 대한 문제에서 중핵을 이루는것으로서 조선혁명의 주체성, 독자성을 견지해나가는데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국제당의 지시대로 만주의 모든 유격부대들에서 조선사람들을 다 뽑아다가 순수한 조선인부대를 따로 편성한다면 그 력량만으로도 능히 조선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 2개 사단력량과 대적하여 혈투를 벌릴수 있었다. 우리가 일당십의 정신으로 일본군과 혈전을 벌리게 되면 조선청년들이 구경만 하고있지는 않을것이였다. 그들이 우리에게 합세하면 전국은 달라지고 조국광복은 훨씬 앞당겨질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여러해동안 한전호에서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련합항일을 해온 공산주의자들로서의 형제적의리, 전우의 의리를 저버릴수 없었다. 자기들쪽에 유리하다고 하여 조선사람들을 다 빼오게 된다면 조선족 군사인원이 90%나 되는 제2군 같은것은 허물어지고말수 있었다.


2군을 제외한 다른 유격부대들에는 중국인들이 과반수였으나 그 대부분은 반일부대출신들이였고 공산주의자들은 많지 못하였다. 그런데다 지휘성원들은 어느 부대에서나 다수가 조선사람들이였다. 각 부대의 핵심력량도 역시 조선인대원들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따로 갈라 부대를 꾸리게 되면 당장은 항일련군부대들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울수밖에 없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기부터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항일련합군을 편성하고 반만항일의 기치밑에 공동투쟁을 조직전개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성과적으로 발전시키고있었다. 새로운 정세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부대가 국경지대에 진출하여 조선혁명에 주력한다고 하여 중국인민의 항일무장부대들과의 공동투쟁을 약화시킬수는 없었다.


파시스트들의 련합된 력량에 맞서 에스빠냐와 같은 나라들에서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진보적세력이 단결하여 싸우고있는 때에 조중항일무장부대를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가른다는것은 시대적추세에도 부합되지 않고 도리에도 어그러지는것이였다.

우리가 중국땅에서 무장투쟁을 벌리고있는 형편에서 조선사람들이 따로 갈라져나와 부대를 조직하게 되면 우리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지지와 도움도 종전보다 약화될수 있었다.

우리가 요구한것은 자주권이였지 분권은 아니였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이 제한과 구속과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혁명을 해나갈수 있는 자주적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할것을 요구한것이지 세력분배를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동지들도 이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위증민은 자기가 모스크바에 다녀와서 나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분권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는 국제당의 의사대로 부대를 민족별로 가르기 위한 대안을 세워보는것이 어떻겠는가고 거듭 말하였다.

《위증민동지, 나는 동지의 심중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그렇게 한곬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기때문에 모든 문제를 혁명의 원칙과 계급적리익의 견지에서 고찰하여야 합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에 대하여 말하는것은 결코 어떤 협애한 민족적리익만을 추구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혁명의 민족적리익은 언제나 국제적리익과 결합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민족적리익과 배치되는 그 어떤 국제적리익도 있을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놓고볼 때 조중항일부대, 그것도 벌써 몇해째 한전호속에서 싸우고있는 통일적인 무장부대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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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렇게 놓고볼 때 조중항일부대, 그것도 벌써 몇해째 한전호속에서 싸우고있는 통일적인 무장부대를 그대로 존속시키는것이 혁명에 더 유리하겠는가 아니면 민족별로 가르는것이 더 유리하겠는가 하는것을 나로서는 심사숙고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항일무장부대를 민족별로 가르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존중해서 제기하는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우리는 결코 문제를 형식적으로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활동하고있습니다. 그런 조건하에서는 형식적인 분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증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되면 국제당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는것으로 되지 않습니까? 도덕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우리에게는 항일련군부대에 조선동지들을 잡아 둘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련군체계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가 조선국내와 동북의 조선인부락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고 중국인부락에 가서는 항일련군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러면 련군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국제당의 지시를 집행하는것으로 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고맙습니다. 김동지가 그처럼 폭넓게 리해해주리라고는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그런 아량을 가지고 이 문제를 대한다면 그것은 중국혁명에 대한 크나큰 지지로 됩니다.》
나는 웃으면서 위증민의 손을 잡았다.
《로위, 우리가 한두해 같이 싸웠습니까. 또 앞으로 한두해만 같이 싸우다가 헤여지겠습니까. 중국이 우리의 이웃에 있고 공산주의리념이 승리하는 나라로 남아있는 한 우리의 우의는 영원히 계속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동지, 나는 동지와 같은 조선동지들과 한대오에서 싸우는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는 김일성사령의 정치위원으로 되려고 합니다. 조선동지들과 더 밀접히 단합해서 조선혁명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가슴 후련해지게 웃었다.

사실 나는 남호두에서 위증민을 만난 다음부터 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위증민자신도 지난날의 실책을 놓고 늘 미안한 생각을 가시지 못해하였다. 그는 국제당 제7차대회 이후 만주지방의 당조직체계를 개편한 다음 남만성위 서기 겸 동북항일련군 1로군 정치위원의 책임적인 직책에 취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기간을 중국동무들이 지휘한 부대가 아니라 내가 친솔한 부대와 함께 다니였다. 그자신이 롱담삼아 말한것과 같이 정말 내가 지휘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위원이 된셈이였다. 무슨 리유에서인지 그는 늘 나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였다. 일제의 관헌자료가 위증민(위민생)을 나의 정치위원이였다고 기록한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사실 나와 함께 장백지구에도 오래 나가있었고 백두산비밀근거지에도 몇번 다녀갔다.

위증민은 남호두회의 이후부터 우리가 주장하는 로선이나 제의에 대하여 거의 반대한 일이 없었다.
반《민생단》투쟁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중공산주의자들의 동맹은 남호두회의를 전후하여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우리는 그후에도 중국공산주의자들, 중국의 반일력량과 공동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10년가까이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혁명을 전진시키고 다른편으로는 중국혁명을 적극 도와주었다. 조중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지지하고 련대한 력사는 이렇게 1930년대초부터 시작되였다.

중국의 어느 한 지도자는 조중인민의 이러한 형제적우의와 지지를 평가하면서 조선인민의 중국에 대한 지지는 가늘지만 길며 중국인민의 조선에 대한 지지는 굵지만 그대신 짧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작은 나라로서 오랜 기간 형제적중국인민을 도와준 우리 인민의 업적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평가가 담겨져있다고 본다.

위증민과의 상봉은 나의 추억속에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인상깊은 사변들중의 하나이다. 그의 모스크바행이 조선혁명앞에 가로놓인 장애를 제거한데서 큰 몫을 담당했던것으로 하여 나는 오늘까지도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여기에 위증민과의 상봉을 더욱 잊을수 없는것으로 만들어준 하나의 일화가 있다.

우리가 군정간부회의준비를 하고있던 어느날 점심참에 전령병이 뛰여와서 큰 범이 우리 망원초를 위협하고있다고 하면서 총소리를 내게 승인해달라고 하였다. 그가 하는 말이 감시조건이 좋은 벼랑바위우에 망원초를 정하였는데 그 벼랑밑에 범의 굴이 있고 큰범이 새끼 두마리를 거느리고 그 굴에서 산다는것이였다. 립초성원들이 무섭다고 망원초위치를 옮기려고 하지만 적당한 장소가 없는데다가 범도 해치려는 기색이 없어 그럭저럭 지내왔는데 어제부터 범이 매우 사납게 날친다는것이였다.

나는 범이 갑자기 사납게 날치는데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것만 같아 망원초가 자리잡고있는 현장으로 가보았다. 벼랑바위우에서 내려다보니 굉장히 큰 갈범이 굴앞에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사연을 알아본데 의하면 범을 노엽힌것은 망원초에 나가있던 우리 대원들이였다. 그들은 굴밖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새끼범들을 데리고 놀다가 발톱에 손등을 긁히게 되자 장난삼아 한대씩 볼통을 가볍게 때려주었다. 먹이를 구하러 갔던 엄지범이 이 광경을 본 다음부터는 망원초를 향해 하루에도 몇차례씩 뢰성벽력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높은 벼랑바위의 중턱에까지 길길이 뛰여오른다는것이였다.

《너무 걱정할것은 없소. 범이 저렇게 야료를 부리는것은 망원초의 동무들이 자기 새끼들을 해칠것 같아 미리부터 위력시위를 하는것이라고 볼수 있소. 저건 두번다시 새끼들을 학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종이나 다름없소. 범도 화약을 가진 사람들과 승산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할테니 안심하는것이 좋겠소.》
내가 이런 말을 해서야 망원초의 동무들은 범을 잡으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그 무서운 산중의 왕과 사이좋게 지내기로 하였다. 첫 조치로 각을 뜬 노루다리 하나를 벼랑바위밑으로 내리던지였다. 그후에도 먹이공급은 며칠동안 계속되였다. 물론 범은 위력시위를 중지하였다. 그후부터 범은 친선적인 우리의 이웃이 되였다. 우리가 남호두를 떠나 백두산지구로 나간 다음에도 이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인민혁명군장병들은 그 범과 《선린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림춘추의 말에 의하면 이 범의 굴을 맨처음으로 발견한것은 대자지하 골안에 와있던 최인준이네 중대라고 하였다. 대자지하골안에는 병원도 있고 병기창도 있고 통신처도 있었다. 후방부문사업을 맡아보는 사람들도 이 골안에 와있었다.
1935년말에 우리의 부름을 받고 왕청에서 남호두쪽으로 원정대를 찾아 들어온 림춘추는 한동안 소구의 빈 탕자막에 병원을 차려놓고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대자지하의 등판에서 더 좋은 밀영지를 발견해내자 그리로 옮겨앉았다. 탕자막이란 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초막을 말한다. 젊어서 산에 들어와서는 칠팔십이 되도록 한평생 탕자막에서 세상을 등지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업은 짐승사냥과 약초캐기와 아편재배였다. 탕자막의 주인들은 거개가 장수자들이였다. 그러나 장수자의 인생에도 끝이 있다. 고독한 그 인생이 종말을 고하면 주인없는 탕자막은 텅 비게 된다.

림춘추네 병원에서는 우리 유격대원들뿐아니라 5군의 부상자들도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에서 바로 왕청련대의 참모장이였던 류란한이 치료를 받다가 병사하였다.
최인준이 지휘하는 왕청3중대는 그들을 보호하고 부양할 의무를 지니고있었다. 중대는 무기와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의 병영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그 전투를 치르고 100여정에 달하는 무기를 로획하였다. 그들은 무기를 보관해둘만한 처소를 물색하다가 병원과 통신처가 자리잡고있는 등판아래의 바위벼랑에서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최인준은 그 굴속에 100여자루의 보총을 집어넣었다. 돌로 굴입구를 대강 막아놓고 벼랑에서 내려오던 그는 또하나의 굴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범굴이였다.
나는 남호두회의를 회상할 때마다 위증민을 추억하게 되며 동시에 이 회의과정의 인기있는 화제거리가 되였던 대자지하밀영의 그 호랑이를 되그려보게 된다.

우리는 1936년 2월하순부터 근 한주일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회의에는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동지들과 함께 김산호, 한흥권, 최춘국, 전만송, 최인준, 박태화, 김려중, 림춘추, 전창철 등 군정간부 30∼40명이 참가하였다. 국제당에 갔다가 쏘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윤병도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소자지하에서 여러달만에 위증민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위증민은 회의참가자들에게 우리가 다홍왜와 요영구에서 제기하였던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국제당의 견해와 지시를 전달해주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위증민이 신병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까지 가서 좋은 결론을 받아온데 대하여 깊은 사의를 표시하였다.

나는 보고에서 1930년대 전반기 두만강연안에서 우리가 전개해온 군사정치활동경험을 총화하고 혁명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나서는 중요한 과업들과 그 수행을 위한 새로운 전략적방침들을 제시하였다.
다시말해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와 백두산지구에로 진출시키며 투쟁무대를 점차 국내에로 확대할데 대한 방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할데 대한 방침, 당창건준비사업을 적극 추진시킬데 대한 방침, 공청을 반일청년동맹으로 개편할데 대한 방침 등 항일무장투쟁과 그를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기 위한 새로운 방도들을 제기하고 토의에 붙이였다.

토론자들은 보고에서 제시된 여러가지 방침들에 대한 절대적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하나의 방침을 두고 서로 갑론을박하면서 입씨름을 하는것과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항일혁명을 시작한후 수많은 회의들을 집행해보았지만 나는 로선토의가 그처럼 순조롭게 되고 회의참가자들의 기분상태가 그처럼 앙양된 회의는 처음 보았다. 그것은 실로 웃음으로 시작되였다가 웃음으로 끝난 회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백두산으로 나갈 날, 국내깊이에 진출하여 원쑤들과의 결전을 벌리게 될 날을 눈앞에 그리며 앞을 다투어 토론에 참가하였다.

백두산과 국내깊이에로 진출하는것은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튼튼히 꾸리고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일제를 쳐물리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투쟁로선이였다. 백두산으로 나가 주력부대를 튼튼히 꾸리고 먼저 국경지대를 장악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투쟁무대를 국내깊이에로 확대할데 대한 우리의 제안은 회의참가자들의 절대적인 지지찬동을 받았다.

우리가 백두산을 근거지로 꾸리고 국경지대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히 벌린다면 일제의 야만적인 군사파쑈통치하에서 신음하고있는 우리 인민에게 조국광복의 서광을 비쳐줄수 있고 우리 혁명군을 일일천추로 기다리며 그 모습만이라도 보고싶어하는 2천만의 동포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줄수 있었다. 이것은 백마디의 말보다도 더 힘있는 시위로 될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전국적판도에서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공산당창건사업을 추진시킬데 대한 우리 혁명의 전략적방침이 채택되였다.
남호두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새로운 앙양기를 맞게 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남호두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와 1930년대 후반기를 구획짓는 조선혁명의 분수령이라고 할수 있다. 남호두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조선혁명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새로운 리정표를 가지게 되였다.

남호두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수 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일련의 결정들은 그이후 여러 단계의 혁명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체적립장을 튼튼히 견지하고 어떤 역경속에서나 그것을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으로 변함없이 틀어쥐고나갈수 있게 하였다.

남호두회의는 또한 승리자들의 잔치라고도 할수 있었다. 이 승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과 인민과 력사와 시대앞에 아낌없이 바친 무수한 희생과 피와 로고의 대가로써 이루어진것이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의 파쟁과 조선공산당의 해산, 반《민생단》투쟁에서 범한 좌경기회주의자들의 오유로 하여 국제당에서도 경원시되고 형제나라 당들에서도 경원시되고 부분적이기는 하나 우리 인민들에게서도 경원시되던 조선공산주의운동은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승승장구할수 있게 되였다.

소자지하에서는 회의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강습이 한주일가량 계속되고 당창건방침에 대한 실현방도를 토의하기 위한 당정치일군회의가 진행되였다.
우리는 강습과 회의들에서 남호두회의방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해설하면서 회의의 기본정신을 반영한 당면한 구호를 제기하였다.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올리자!》, 이것은 우리 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것을 바라고 내놓은 우리의 구호였다.
우리는 남호두회의후에 보무당당히 조국에로의 진출의 길에 올랐다.
항일무장투쟁은 자기 발전의 새로운 단계에로 바야흐로 들어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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