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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 (3)   10-08-24
나그네   3,954
 
        개싸움의 역사(3)

    19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은 온통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고

맙니다. 30년대 내내 감돌던 검은 전쟁의 먹구름이 드디어 현실이 된 셈이었지요.

베어마흐트(독일육군)는 입체전 개념의 전격전 전술로 세계를 놀래킵니다. 루프트바페

(독일공군) JU-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공중근접지원에 힘입은 독일 전차(사실 요

즘의 기준으로 보면 전차라기보다는 거의 장갑차 수준이지만)들의 조직적인 돌파전술 앞

에 거의 5세기가 넘는 찬란한 전통을 유지했던 기병강국 폴란드는 번번히 저항조차 해보

지 못하고 한 달도 못되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하늘에서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폭탄을 투하하는 수투카 앞에 폴란드군은 거의 패닉상태로 도주하기 바빴고 전차들을 조

직적으로 조합해 돌진해오는 베어마흐트앞에 평탄한 평원으로 이뤄진 폴란드는 어찌 해볼

바를 몰랐습니다. 이후 독일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물론

베네룩스 3국까지 특유의 전격전 앞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모두 백기를 들고 말았죠.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이 신속하게 제공권을 장악하면 독일의 폭격기들이 일제히 주요

거점을 폭격하여 무력화시키고 이어 독일 전차와 기계화부대들의 돌파를 시도하면 1차 대

전식 참호전개념에 익숙해 있던 대다수 유럽의 군대들은 어찌해볼바를 몰랐던 셈이지요.

이는 사실상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습

니다. 특히 5백만 대군과 결코 독일전차에 뒤지지 않았던 기갑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육

군강국 프랑스가 마지노 요새를 너무 맹신했던 나머지 불과 6주간의 전투 끝에 손을 들

어버린 일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노 요새의 측면, 즉 벨기에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해온 독일의 기갑부대 앞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보병부대를 지원하

기 위해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었던 프랑스의 전차들은 각개격파 되고 말았고 결코 독일

전투기에 뒤지지 않았던 프랑스의 전투기들 역시 너무도 빨리 지상거점(공군기지)를

육군이 내주게 되자, 무력하게 분산되어버립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해군강국인 영국은 BEF(프랑스 원정 육군)가

지상병력의 거의 대부분이었고 이들 30만 병력이 덩케르크에서 독일기갑부대에게 포위되

자 사실상 본토를 수비할 힘이 전무해져 버렸습니다. 부랴부랴 활용가능한 모든 선박(손

으로 노를 젓는 보트까지 동원했었으니 당시 영국이 얼마나 다급했었는지 알만하죠)과

공군력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덩케르크에 갇힌 영국군 대부분과 프랑스군 일부(4만명)를

구출하기는 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해변가에 그들의 장비를 모조리 버려두고 몸만 빠져나

온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5백만 육군을 거느렸던 강대국 프랑스가 전격전에 밀려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독일에게 어이없이 항복해버리자, 사실상 영국은 불과 9개월만에 서유럽

전체를 석권해버린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게 단독으로 맞서는 상황이 됩니다.

 

 

     당시 영국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5척의 전함과 7척의 항모를 가진 해군

력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이들은 크릭스 마리네(독일해군) U 보트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더구나 2차대전에서 마침내 잠재력을 인정받게 된 루프트바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

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30만에 가까운 프랑스 원정군을 빼내오기는 했지만 당장 이들을

무장시킬 소총조차 부족했던 상황이었고 포탄과 탄약의 부족은 이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기본적인 개인화기마저 부족했으니, 중화기나 기갑부대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350만에 가까운 베어마흐트와 이들의 기갑부대가 만약 짧은 영불해협을 건너오기라도 한

다면 승산은 전무했지요. 루프트바페의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이무렵 서유럽의 공군기

지에 대기시키고 있던 항공력은 1,800여대의 폭격기와 900여대의 전투기에 이르렀고 이에

맞설 영국공군은 고작 52개 비행중대의 전투기 700여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이 전투

기 병력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프랑스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모든 항공전력을 다 투입하려

던 처칠 총리의 명령을 고집스럽게 거부한 휴 다우딩 공군 사령관의 선견지명 덕분이었

지요. 다우딩 원수는 이미 프랑스전선이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다음 전투는 영국의 하늘

이 될 것임을 예견했고 총리를 설득해 더 이상의 축차투입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전투기

병력을 보존한 게 이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루프트바페의 파일럿들은 이미 30년대 중반

부터 스페인 내전등에 참전하며 경험을 축적한 베테랑들이 즐비한 반면, RAF(영국공군)

의 파일럿들은 전투경험도 부족했고 그나마 대체할 예비 파일럿들조차도 매우 부족한

상태였으니, 이는 처음부터 애와 어른의 싸움처럼 보였습니다. 이 무렵 영국 정부는 실

제로 왕실과 내각을 가장 가까운 영연방국가인 캐나다로 옮기고 거기서 해외식민지를 근

거로 싸울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당시 영국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몰렸는지는 미뤄

짐작이 가시리라 봅니다.

 

 

   이 상태에서 영국에게 명예로운 화평을 요청한 독일총통 히틀러는 자신이 이성과 관용

에 입각한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고 자찬했으나, 영국의 답신은 싸늘한 거절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40년 7월 후일 배틀 오브 브리튼으로 세상에 알려질 2차대전 최초의 항공

맞대결이 시작됩니다. 전함 한 척 변변히 없는 크릭스 마리네(독일해군)가 노르웨이에

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터라 독일이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국의 공군력

을 무력화시킨 후 막강한 육군을 신속하게 공수 혹은 상륙시키는 방법이 최선이었기에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작전(일명 시라이언)의 선봉은 루프트바페의 몫이었습니다.

루프트바페의 총수 헤르만 괴링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일단 너무도 압도적인 숫적 우

위와 질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대원들의 사기도 높았으니까요.

 

   당시 루프프바페의 주력전투기인 1인승단발기 ME 109는 여타 유럽의 그 어떤 전투기

보다 빠르게 상승과 하강을 할 수 있었고 1만1천 미터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최고시속은 거의 650킬로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20밀리 기관포 3문과 2문의

기관총이라는 막강한 화력으로 1차 대전 당시 최고상승고도 5천미터에 시속 200킬로로

기껏해야 한,두정의 기관총을 달고 싸우던 시절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녀석을

보유하고 있었고 9개월간의 전투기간 동안 고작 100여대 이하의 손실을 입고서 전 서유

럽을 석권한 주역이었습니다. 특유의 사이렌소리로 전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수투카

급강하폭격기와 더불어 하인켈과 도르니어의 폭격기들 역시 날렵하고 신속한 움직임으로

적의 거점을 쓸어버리곤 했으니 그야말로 거칠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무적의

루프트바페에게도 다가올 영국과의 항공전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었

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선 2편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간기 미 육군항공대의 대표적인 전투기 옹호론자였던

클레어 셰놀트 대위의 지론을 인용해보면, 전간기 내내 셰놀트는 아무리 폭격기의 위

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조직적인 화력통제장치와 체계화된 조기경보 시스템하에서라면

비록 구식전투기라고 할지라도 어떤 폭격기의 공격도 저지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루프트바페가 상대해야 할 RAF(Royal Air Force:영국공군)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1940년 여름 RAF는 울트라라고 불리우던 초특급기밀의 존재였던 암호해독

센터의 도움으로 독일군의 통신암호 에니그마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른바 전파탐지장치(후일 레이다로 알려질)라는 조기경보시스템

과 이를 중앙(내각과 영국군총사령부가 모두 참여하는 전쟁지휘부)에서 통제하는 거대한

지휘통신(이 통신망을 운영하는 주역은 RAF의 여군보조부대원들이었다고 하네요)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이를 통해 전 RAF 전투기 중대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변수는 바로 영국과의 거리였습니다. 이제까지의 전격전에서 루프트바페는 베어마

흐트의 신속한 전진에 힘입어 손쉽게 적의 비행장을 점령해 다시 이용할 수 있었고 이를 거

점으로 더욱 더 매섭게 상대를 몰아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9개월 내내 거의 항속거리를

신경쓰지 않은 셈이었지만, 영국을 상대로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네덜란드와 막

점령한 프랑스 북부의 활주로와 기지를 이용한다고 해도 루프트바페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거친 영불해협을 건넌 이후 머무는 시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30년대

내내 루프트바페의 항공기들이 주로 단거리 위주의 제공권장악과 공중근접지원(이른바 공중

포병)의 개념하에서 설계되고 개발된 때문이었지요. 거기에 RAF의 지휘통제시스템은

휴 다우딩 원수의 지휘하에 단일화되어 있었던 반면, 서유럽에서 시라이온 작전을 주도할

괴링의 5개 항공사단들은 케셀링과 스피어 원수에게 각각 지휘체계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최전선에서 거의 천킬로 이상 후방에서 전체를 지휘하고 있던 괴링의 무계획한 전략전술,

무성의한 준비와 엉성한 군수지원 역시 루프트바페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40년 7월 10일 처음 개시된 영국항구 일대의 폭격에서부터 루프트바페의 공격은 산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폭격했던 목표물들이 후일 베어마흐트와 크릭스마리네가 영국

진격시 사용해야 할 시설물들이었으니까요. 각군간의 협력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

지요. 7월 16일 총통명령 제16호에 의거 전 RAF를 쓸어버리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거의

석달반에 걸친 치열한 배틀 오브 브리튼의 막이 오릅니다. 이런저런 준비로 총통의 지시

후에도 거의 한달만에 개시된 8월 8일의 루프트바페의 공습은 무려 1,485대에 이르는 엄

청난 것이었고 동월 15일에는 무려 1,786대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가 동원됩니다.

루프트바페는 손쉬운 승리를 장담하며 이렇듯 엄청난 수의 항공기를 동원해 파상 공

세를 펼쳤지만 막상 성과는 보잘 것 없었고, 늘상 RAF의 피해를 훨씬 상회하는 출혈을

입게 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루프트바페가 공격을 하게 되면

그 어떤 나라도 몇주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제공권을 내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RAF

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집요하고 조직적으로 저항을 해오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습

니다. 먼저 루프트바페는 그 어떤 고도와 항로를 택하더라도 항상 RAF의 전투기들이

먼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루프트바페의 항공기들이 영국해협을 건너오는 동안 영국의 초특급 비밀병기였던 레이

다는 이들의 속도와 예상 항로와 고도를 정확하게 파악해 런던의 지하 벙커에 위치한

공군지휘통제소에 이를 보고했고 RAF는 적의 습격에 대비해 하늘을 초계 정찰하거나

하는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 없이 언제나 최적의 위치에서 이들을 요격할 기회

를 잡곤 했습니다. 루프트바페는 맨 처음부터 정보와 체계적인 시스템 운영에서 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26전투기편대의 지휘관이었던 아돌프 갈란트 대령(후일 전투기

대 총감에 오르는 루프트바페 최고의 스타급 에이스로 1차대전 당시 붉은 남작 리히트

호펜에 버금가는 인기와 명성을 누렸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괴링의 눈밖에 나곤 했다.

2차대전 기간에도 보기 드물게 과거 1차대전 파일럿들이 가졌던 기사도 정신과 인간미를

풍겼고 이를 적인 연합군에게도 보였던 덕분에 연합국 파일럿에게조차도 찬사를 받았다)의

회고에 따르면 "우리가 가진 정보는 언제나 3시간 전의 상황인데 반해, 저들(영국공군)

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언제나 3분전의 최신정보였다"라고 푸념을 할 정도였습니다.

 

   루프트바페의 또 다른 오판은 상대방의 전투기와 생산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었습니다. RAF는 스핏파이어라는 ME 109에 필적하는 뛰어난 성능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 최신형 스핏파이어는 생산대수가 부족해 엄밀히 말해서

RAF의 주력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루프트바페가 자국의 쌍발 전투기인 ME 110보다

더 성능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했던 RAF의 주력기였던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는 생각보다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던 것이죠. RAF의 전투기중 최초로 300마일의 벽을 넘었던 호커

허리케인은 둔탁하고 투박하게 생겼지만, 8정의 기관총이라는 강력한 화력과 더불어

피탄되더라도 그냥 갈아버리면 그만인 캔버스제 천조각으로 만들어져 내구성이 뛰어나

고 수리하기가 매우 용이했습니다. 여기에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은 절묘한 임무분담을

통해서 매우 효과적으로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견제하곤 했습니다. 먼저 루프트바페가

공습을 해오면 빠르고 기동성이 좋은 RAF의 스핏파이어들은 레이더로 적의 접근을 확인

한 공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최적의 요격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을 호위하고 있는 ME109전투기들을 먼저 공격하고 이들이 공중에서 난전을 벌이

면서 호위망이 흐트러지면 대기하고 있던 허리케인 전투기들이 막강한 화력을 이용해 상

대적으로 느린 하인켈과 도르니어 폭격기들을 잡아냈습니다. 특히나 전쟁 초반 무적을 자

랑했던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은 너무 둔하고 느렸기에 허리케인의 밥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닐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곧 영국공격의 대열에서 빠지게 됩니다.

 

    1차 대전에서 모두가 체험했던 금언, 하늘에서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발

견해야 한다는 말 그대로 RAF는 언제나 루프트바페를 먼저 볼 수 있었기에 상대의 막강

한 수적질적 우위와 뛰어난 파일럿 그리고 높은 사기에도 불구하고 열세에서도 선전합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 상주하고 있던 독일의 첩보조직은 영국의 전투기 생산능력을 과소

평가하여 한달에 고작해야 300대로 본국에 보고하지만, 이시기 전투기 생산을 관장하던

군수성 장관 비버브룩경은 전투기 생산에 국운이 걸렸음을 인지하고 필사적으로 생산을

독려하여 이시기 영국의 전투기 생산량은 한달에 독일이 추산하고 있던 수의 2배인

거의 600대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루프트바페는 파괴한 적기의 숫자보다 더

빠르게 RAF의 전투기숫자가 보충이 되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게 됩니다.

 

 

   이른바 독수리의 날로 명명해 RAF의 명맥을 끊겠다고 작정하고 달려든 8월 13일, 루프트

바페는 1,485대의 항공기를 동원했지만 46대를 잃었고 그에 비해 RAF의 피해는 고작 13

대(그중 6명은 생존)에 불과했습니다. 다음 날도 27대를 잃었던 데 비해 영국의 피해는

11대에 그쳤지요. 먼저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ME 109에 맞서는 스핏

파이어의 경이로운 선회능력에 경악했습니다. 비록 수치상 상승력과 급강하에서 109가

앞서기는 했지만 실전에서 스핏파이어는 오늘날까지도 인정받고 있는 그 아름다운 유선

형 설계에 비견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선회력과 109 못지 않는 펀치력을 선보이며 독일

파일럿들의 숨통을 조였고 이들과 공중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사이, 정작 자신들이 보호

해야 할 폭격기들은 그틈을 파고든 허리케인의 집중사격을 받아 추락하거나 손상을 입었

고 허겁지겁 폭탄을 내버리며 도주해야 했습니다. 스핏파이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

는지는 앞서 언급했던 갈란트 대령의 이 한마디로 짐작이 가능합니다. 계속 부진한 전과

에 실망한 괴링이 현지부대를 시찰하면서 갈란트에게 "현재 루프트바페에 필요한 게

뭔가? 내가 마련해주겠네!"하자 직언하기를 좋아했던 갈란트는 대놓고 "저희에게 스핏

파이어를 주십시오. 원수님!"이라고 말해버립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독일 파일럿들의

눈에도 도저히 파고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각도로 파고들며 공격해오는 영국의

스핏파이어의 선회력과 경쾌한 기동성을 인정했던 셈입니다. 이후 ME 109와 스핏파이어

는 그해 내내 하늘의 왕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개싸움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국의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개싸움에서 루프트바페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항속거리의 한계를 생각지 않았던 RAF의 전투기들과는 달리 영불해협을 다시 되

짚어 가야 했던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은 연료의 한계 때문에 고작해야 15분에서 30분 이

상 목표상공에 머무르기가 힘들었고 사소한 고장이나 경미한 손상을 입어도 RAF처럼

바로 조처를 취하거나 비상착륙을 할 수가 없었기에 고전합니다. 요컨대 뉴질랜드 출신

의 RAF에이스 앨런 디르는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에 무려 9번이나 피탄되었지만 대부분

인근 비행장으로 비상착륙하거나 비상 탈출해 다시 싸움에 임할 수 있었던데 비해 영국

상공에서 피탄된 루프트바페 파일럿의 운명은 잘해야 포로, 재수 없으면 성난 영국민중

에게 맞아죽는 일까지 있었으니 세간의 속설 "*개도 제집에서는 절반은 그냥 먹고 들어간

다"라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상당수의 행방불명된 루프

트바페 항공기들이 파손으로 인해 귀환도중 영불해협에 추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역

시도 루프트바페를 점점 더 힘들게 했습니다. 그 해 여름 내내 해가 늦게 지는 북유럽 영

국의 하늘에서는 생사를 건 하늘의 혈투가 매일 매일 벌어지곤 했고 영국의 방송들은 이

를 생중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면 1차대전 당시 기사도 정신에 입각해 상대

방의 기체만을 공격하는 낭만은 거의 사라졌고 심지어는 피탄된 기체에서 낙하산으로 탈

출하는 파일럿을 향해서도 기총세례를 가할 정도로 서로간의 대결은 극심한 양상을 띱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은 매우 참혹했습니다. 너무 많은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얽히고 섥히는

통에 우군의 사격에 피탄되거나 추락하는 경우도 속출했고 드물었지만 피탄된 기체로 폭격

기에 돌입하는 이른바 카미카제식 자살돌격을 시도한 RAF의 파일럿이 있었을 정도였지요.

항공전문가들은 이시기에 세운 격추기록에 대해서 그 어느 시기의 전투기록보다 높은 평

가와 점수를 주는 이유도 그만큼 양측 파일럿들의 기량이 정상급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1편에서 언급했던 초기 공중전 시기의 금언들은 여전히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지요.

다만 좀 더 우수한 성능의 기체로 좀 더 빠르고 더 높은 공간에서 더 무시무시한 화력을

가지고서 서로간에 개싸움을 벌였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습니다. 이 시기 에이스로 명

성을 날린 파일럿들 대부분이 영국과 독일이라는 국적의 차이를 떠나, 상대를 먼저 보고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후 상대의 6시 방향에 근접해 정확한 사격으로 승부를 결정 짓

는 공중근접전, 개싸움의 기본 논리에 충실했고 이 과정에서 대담함과 침착성을 잃지 않

아야 했지요.

그러나 모든 파일럿들이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파일럿이 부족했던 RAF

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이들을 대체할 예비파일럿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파일럿을 양성하는 항공학교의 과정은 턱없이 빨리 단축되었

고 고작 20시간의 비행시간을 이수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이 때

문에 실전경험이 전무한 신참파일럿들은 실전에서 경험을 통해 비행을 익혀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죠. 그러다보니, 신참들은 실전투입 첫날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악순환

이 거듭되었고 운이 좋은 소수의 몇몇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 달도 안돼 에이스(5대

를 격추하면 주는 칭호)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루프트바페

가 여름내내 틈을 주지 않고 연일 파상공세를 계속해오자, RAF의 파일럿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출격을 거듭해야 했고 심한 날에는 무려 9번이나 출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

니다. 이 때문에 몇몇 파일럿들은 너무 피로에 지쳐 졸면서 착륙하다 기체가 뒤집혀 사망

했고 어떤 파일럿은 기체를 세우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려 부상당한 줄 알고 허겁지겁

달려온 지상요원들을 실소케 했습니다.

 

 

 

쩝...쓰다보니 쓸데 없는 잡얘기가 너무 많아집니다. 아무래로 영국 항공전을 한편 더 써야 할 듯 합니다.

저는 왜 권종상님처럼 간결하게 할 얘기를 제한된 공간에 쓰질 못하고 질질 늘려 쓰게 될까요....

삼천포로 빠짐을 용서하시고 걍 즐겨주소서...쩝...담엔 좀 더 간결한 글을 쓰겠습니다.

 
제이엘 10-08-24 18:02
 
나그네님이 쓰신 전사를 읽으면 곁가지던 삼천포로 빠지던 항상 흥미있고 잼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흐르듯이 쭉 잘 읽었습니다.  영국과 독일의 공중전에서 그당시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레이다 시스템이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는것이 흥미롭군요.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나그네 10-08-24 19:18
 
재밌게 보셨다니, 고맙습니다.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했는데 쓰고 보니 이지경이 되고 말았네요.
조조 10-08-24 22:22
 
지두 잘읽었내유 감사해유...
강산 10-08-25 02:37
 
나그네님,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짧으면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해도 빨리 끝나버리니 실망을 하게 되지요.  글을 읽는 동안의 즐거움이 너무 짧으니까요.  나그네님의 글은 아무리 길어도 독자들을 집중하게 하고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합니다.  그래 길면 길수록 좋은 글입니다.

힌트: 너무 길면 절반씩 두번에 올려만 주시면 됩니다. ㅎㅎㅎ

밤이 깊도록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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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추석 (팔월 한가위) (2) 마하 09-10 3123
226 호랑이를 죽인 토끼의 명언. (3) 농담 09-10 3024
225 누워서도 잘 보이는데.... (4) 푸하하하 09-10 3102
224 잘 닦아주세요 . (1) maha 09-10 3215
223 한국 국가경쟁력 22위… 3년째 하락 (2) 강산 09-10 3011
222 Terry Jones 목사의 생쑈! (9) 제이엘 09-09 3620
221 알약 하나 잡수세요 (1) 돼지 09-09 3946
220 이 불황의 시대에 FDK를 시행하는 나라는 과연… (10) 나그네 09-09 3437
219 이대통령 예정없던 러시아 방문 왜? (1) 와카노 09-09 3431
218 122년 전 독일 실패 답습하는 MB 정부의 4대강 … (1) 돼지 09-08 3713
217 그 쇳물 쓰지 마라 (10) 제이엘 09-08 3177
216 세계 최대 환경단체 ‘지구의 벗’, 4대강 ‘… (1) 강산 09-08 3351
215 천안함 조사결과 신뢰하는 국민, 32.5%에 불과 강산 09-08 3659
214 4 대강 침수와 침묵하는 언론, 왜 ? 마하 09-08 3345
213 개싸움의 역사(9)//초강력 에어파워도 굴복시… (6) 나그네 09-08 3694
212 님의 눈길 머무는 뜨락에 (3) 장미 09-08 3403
211 (속보) 강용석-"여성 로비스트 최후의 무기는 … (2) 인간이되거라 09-08 3057
210 <박용만과 그의 시대 3>-"나의 나라를 구… (4) 도르테아 09-07 3567
209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 "국감 증인 참석 용… (1) 제이엘 09-07 3290
208 공정(?)한 사회.. (1) 제이엘 09-07 3427
207 편리하게 이용해 주시고 자주 가시는 사이트… 시애틀k 09-07 3256
206 진보에 대한 고찰 (1) 돼지 09-07 3548
205 <박용만과 그의 시대>제 2회 (2) 강산 09-07 3378
204 <평전>박용만과 그의 시대 (도르테아님이… (2) 강산 09-06 3302
203 이 가을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3) 장미 09-06 3119
202 막거리 한잔 (4) 홍길동 09-06 3364
201 [발언대] 이명박정부 고위공직 딱 원숭이 수… (3) 강산 09-06 3106
200 "외교부 간부, '유명환 딸' 알고 만점 … (2) 강산 09-06 3093
199 ' 개구리 에이즈 ' (3) 마하 09-05 3326
198 개싸움의 역사(8)//세이버와 미그, 한반도 하… (3) 나그네 09-05 3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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