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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28회   20-03-23
강산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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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은 밖에서 승용차 멎는 소리가 들리기에 외출했던 오빠가 집으로 돌아오는줄만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귀에 선 목소리가 오빠를 찾았다. 한윤호남매가 비둘기처럼 오붓하게 살림을 펴고 사는 경상골의 이 단층독채에는 지금까지 별반 손님이 찾아온 일이 없었다.

방문을 연 옥산은 마당에 뜻밖에도 강선제강소 지배인 차승룡이 서있는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반가와하였다. 옥산은 취재차로 강선제강소에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차승룡이와 퍽 가까운 사이로 되였다. 차승룡은 한윤호의 동생인 옥산을 각별히 존대해주었다.

《오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차승룡이 밖에 선채로 물었다.

《예.》

옥산은 휘우듬이 굽어든 눈섭을 치켜들고 차승룡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승룡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다는것을 알아차린 옥산은 손님더러 어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사실 차승룡이 이 집을 찾게 된데는 까닭이 있었다. 우리 나라의 손꼽히는 야금기업소 지배인인 차승룡은 언제부터인가 자기네 기업소를 차별하면서 따돌리는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하였다. 관리국이나 성, 국가계획위원회에 오르내리면서 우연히 오고가는 말들에서나 계획시달, 새로운 과업포치, 총화, 자재분배 등에서 은연중 그러한 느낌을 받았던것이다.

선입감이란 이상한것이였다. 그런 느낌이 일단 머리속에 스며들자 의혹의 검은 씨앗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자라오르면서 그를 괴롭혔다. 그때부터 차승룡에게 자기 기업소를 성진제강소와 대비하는 버릇이 생겨나게 되였다. 김책제철소나 황해제철소는 덩지도 크고 생산분야도 자기네와는 차이가 많았지만 성진제강소와는 같은 제강소로서 자기네 기업소와 규모에서나 발전력사, 기술공정 등에서 매우 근사하였다. 그래서 성진제강소와 대비해보면 우의 일군들이 자기네 기업소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것이 한결 뚜렷해졌다.

그는 얼마전에 금속관리국에 회의하러왔다가 우연히 형제나라들의 원조분배안을 작성한 문건을 본 일이 있었다. 성진제강소와 대비해볼 때 확실히 자기네한테 배당된 자재와 자금은 린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강선제강소가 제힘으로 복구할 결의를 다진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처럼 차별적으로 대할수 있는가.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것인가를 여러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우에다 올리받칠것인가, 도와달라고 하소연할것인가, 모르는척 시치미를 뗄것인가, 달게 접수하는 시늉을 할것인가.… 돛을 제때에 올리자면 바람방향을 잘 가늠해보아야 한다. 그는 여러가지로 해결책을 가늠해보았으나 종당에는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던 끝에 이 분야의 실무가이고 유력자인 한윤호를 만나 먼저 그의 속심부터 타진해보기로 결심했다. 소심하고 타산이 많은 그는 이런 결심을 내린후에도 한동안 차일피일 미루다가 특수용접봉에서 실패가 거듭되고 분괴압연기수압시험에서도 실패를 하자 마침내 더는 미룰수 없다고 용단을 내렸다.

림형관이나 신철, 리웅천을 믿고 축세기복구며 가열로확장공사를 벌렸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그 모든 책임을 지배인인 자기가 몽땅 짊어지고 나앉을 판이였다. 아니다. 그렇게 할수 없다. 차승룡은 그런 위험한 줄타기를 할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는 매사에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길을 톺으면서 제강소도 살리고 자기도 우로 치달아오르자면 권한이 있고 힘이 있는 줄을 잡는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깊이 확신하고있었다. 그러한 줄을 그는 이미 안면을 익힌 한윤호에게서 찾았다. 그리하여 지금 관리국회의에 올라왔던 걸음에 한윤호네 집을 찾게 된것이였다.

《리웅천, 신철동지들이랑 다 잘 있습니까?》

옥산은 차승룡이 방에 들어서자 물었다.

《예, 잘 있습니다.》

《분괴압연기복구도 잘돼가는가요?》

《예, 그럭저럭...

《왜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기쁨과 반가움에 넘쳐있던 옥산의 생기발랄한 얼굴이 대번에 흐려졌다. 차승룡은 옥산이와 상종하는 과정에 처녀의 감정변화가 때때로 얼마나 급격하고 돌발적이던지 속심을 깊이 묻어두고 사는 그로서는 도저히 리해가 되지 않아 얼떠름해지는 때가 뜨문했다. 지금도 차승룡은 자기의 말에 옥산이 정도 이상으로 반응을 하는데 놀라 손부터 내저었다.

《크게 걱정할건 없습니다. 일을 하느라면 실패도 더러 있지요....

차승룡이 걱정할것이 없다고 했지만 옥산은 종시 마음을 놓지 못하고있다가 갑자기 잊은것을 상기한듯 그에게 쏘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방안은 쏘파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요긴한것만 있고 한갖 장식을 위한 가구나 물품 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방안 구석구석에는 빈집 같은 랭기가 도사리고있었다. 확실히 이 집에서는 단란한 가정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고 가고오는 사람들이 하루밤 묵어가는 려관방 같은 느낌만 들었다.

《식사전이겠군요. 그런데 운전사동문 들어오지 않아요?》

옥산이 물었다. 차승룡은 개방적이고 덜렁덜렁한 성미인 옥산에게 운전사에게까지 관심을 돌리는 그런 세심한 구석이 있는것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물론 식사전이지요. 운전산 내가 찾겠습니다.》

《앉아서 차나 드세요. 제가 데려오지요.》

《아니 아니 그만 두십시오.》

차승룡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운전사에게 따로 신호를 보낼 일이 있었다. 한윤호와 조용히 만날 기회를 엿보아온 그는 이번 방문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둔것이 있었던것이다.

《영복동무, 그걸 들고오라구.》

방문을 열고나간 차승룡이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지배인으로부터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고있던 영복이 두손에 커다란 초롱을 들고 제창 부엌에 들어섰다.

《뭐예요?》

부엌에 있던 옥산이 초롱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 순간 초롱에서 무엇인가 푸들쩍하더니 물장구를 탕 쳤다. 화닥닥 놀란 옥산이 하마트면 뒤로 벌렁 넘어질번 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대동강에서 잡은 잉어입니다.》

《살았군요.》

옥산은 초롱에 든 팔뚝보다 더 커보이는 잉어를 의아쩍게 내려다보았다.

《살았지요. 말두 마십시오. 산채로 가져오느라고 운전사동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차승룡이 호기심을 북돋았으나 옥산은 조금도 반가와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차승룡은 중앙아시아의 모래밭에서 자라난 이 처녀가 살아서 꼬리치는 잉어의 진가를 알리 없다고 생각하고 한참이나 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래도 옥산이에게서는 조금도 흥미를 느끼거나 구미가 동해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걸 어쩔셈이예요?》

옥산은 거의나 시끄럽다는 식으로 물었다. 차승룡은 아연해졌다.

《어쩌다니, 먹어야지요.》

《어떻게?》

《한놈은 국을 끓이고 다른 놈은 회를 칩시다.》

《회?》

《그렇지요.》

《회가 뭐예요?》

옥산은 혀가 잘 돌지 않아 회란 발음을 겨우 하였다.

《아니 회가 무언지도 모르는가? 영복이, 회를 로어로 뭐라고 하오?》

《알게 뭡니까.》

《안되겠소. 그럼 회는 우리가 치기로 하고 옥산동문 국이나 끓이오. 그거야 할수 있겠지.》

《탄불이 죽었어요.》

《탄불까지?》

차승룡은 부엌에 내려서서 아궁을 들여다보니 아궁에는 금시 서리가 내돋힐듯 랭기가 꽉 차있었다.

《아니, 엄동설한에 불까지 죽이고 어떻게 삽니까?》

《흘레브, 빠다, 차면 다지요. 나머지는 참으면 되니까요. 어려운 때니까.》

《어려운 때, 하하... 정말 랑만적입니다. 영복이, 동문 이제부터 무연탄불을 지피고 난 회를 치겠소. 옥산동문 국을 끓이고... 이러다간 대접받기는 커녕 저녁까지 굶겠소.》

차승룡은 제집처럼 옥산이와 영복에게 지시를 주고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러자 옥산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옥산은 신이 나서 들락날락하며 창고안에서 나무를 날라들이고 무연탄을 이겼다. 아궁에는 오래동안 불기운이 들어가보지 못한듯 매운 연기만 쓸어나왔다. 할수 없이 영복은 승용차의 휘발유를 뽑아다 불을 지필수밖에 없었다.

옥산이 흥미를 느끼는것은 차승룡이 회를 치는 솜씨였다.

《이걸 잡소.》

차승룡이 칼도마에 올라가서도 아가미를 풀럭풀럭하고 꼬리를 철떡거리는 잉어를 가리키며 옥산에게 말했다. 옥산이 꼬리를 눌러잡자 차승룡이 한손으로는 잉어대가리를 눌러잡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쥐였다.

《아주 큰놈이군요.》

《4년 자란것입니다.》

《4년? 어떻게 알아요?》

《비늘을 보십시오.》 차승룡이 잉어몸뚱이에서 큼직한 비늘 한쪼각을 떼서 옥산이에게 주며 설명했다. 《비늘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등불에 대고 자세히 보십시오. 확대경이 있으면 더욱 좋고...

《무슨 줄 같은것이 있군요.》

《몇개입니까?》

차승룡이 잉어목에 칼날을 대며 물었다.

《4개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4년 자란것이 아닙니까. 나무의 년륜처럼 잉어비늘의 줄도 1년에 한돌기씩 새겨집니다.》

《호호...

옥산은 신기하다는듯이 비늘쪼각 여럿을 대조해보면서 깔깔거리였다. 그때 잉어가 다시한번 펄떡 용을 쓰자 전등불에 은빛비늘이 번쩍했다.

《단단히 잡으시오. 그러다 놓칠수 있소.》

차승룡이 주의를 주고 잉어목을 따기 시작하였다. 칼이 무딘지 잉어의 목뼈가 굳었던지 차승룡은 안깐힘을 써서야 겨우 목을 잘랐다. 운모쪼각 같은 촘촘한 비늘을 굵어내고 가죽과 살사이에 손바닥을 밀어넣어 껍질을 벗겨내자 발기우리한 맨살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났다.

옥산이 잉어피와 내장이 든 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차승룡이 수상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어쩌자는겁니까?》

《버려야지요.》

《버리다니. 허허. 잉어피와 간은 보약재입니다.》

《보약재요?》

《그렇지요. 사양말고 마시십시오.》차승룡은 잉어피가 고인 고뿌를 옥산에게 내밀며 권했다. 《당장 효험이 나타날겝니다.》

《아니 피를 마신단 말이예요?》

옥산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듯 까만 눈을 치켜뜨고 차승룡을 바라보았다.

《보약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긴 옥산동문 한창나이 청춘이고 건강체니까.》

《지배인동지가 드십시오. 얼마나 생생합니까.》

탄불을 살린 운전사가 차승룡의 등뒤에 서서 구미를 돋구었다.

《할수 없지.》

차승룡이 고뿌를 들고 입맛을 다시더니 눈깜빡할사이에 밑굽을 내였다. 옥산은 몸서리를 쳤다.

《나를 흡혈귀를 바라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허허…》 차승룡이 입가녁을 훔치고 웃자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불기운이 들어가본지 오랜 아궁에서는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솟구쳐나왔다. 춥지만 부엌문을 열어제끼지 않을수 없었다.

《이건 뭐요?》

문득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한윤호였다.

《오빠, 지배인동무가 굉장한 료리를 만들어요.》

옥산이 한윤호에게 그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했다.

《흥.》

한윤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엷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손님들더러 고맙다거나 수고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애초에 부엌을 내려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삭바르고 교제술이 좋은 차승룡은 한윤호가 그렇게 하는것은 다만 위엄을 돋구기 위한 허세이고 입을 비죽거리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는것을 빤히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럭저럭 국도 끓었고 회도 다 되였다. 밥은 빵으로 대신할수밖에 없었다. 시퍼런 불길을 솟구며 탄불이 활활 타오르자 구들이 따끈따끈해오고 방에도 온기가 돌았다.

뚝한 표정으로 아닌보살하고 앉아있던 한윤호도 그 온기에 마음이 풀리기라도 한듯 얼굴에 화색을 지었다.

얼마후 그들은 한집안식구처럼 아래방에 둥글상을 놓고 모두 둘러앉았다. 옥산이 내놓은 폭신한 방석은 다 밀어놓았다.

《이제야 사람사는 집 같군.》

한윤호가 더없이 좋아하였다.

《워드까, 포도주 있는대로 내놔라. 운전사동무도 가까이 나앉소.》

한윤호는 연송 옥산에게 무엇인가 지시하였다. 그러면 옥산은 냉큼 일어나 부엌과 웃간에 간수했던 온갖 희귀한것들을 다 들추어냈다. 차승룡은 어떤 자리에서나 술을 석잔이상 하지 않는 성미였으나 이날저녁만은 술이 고급인데다가 안주가 좋고 방이 더워 술이 온몸에 잘 퍼진다면서 한윤호가 권하는대로 넙적넙적 받아마시였다. 그런데 한윤호는 기분이 좋아 전에 없이 말은 많이 하면서도 술은 얼마 들지 않았다. 차승룡이 보기에 쏘련에서 나온 어떤 사람들은 대체로 놀기를 잘하고 술을 많이 마시였으며 녀색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 한윤호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술도 얼마 들지 않았고 안해와 자녀는 멀리 중앙아시아에 둔채 조국에 나와서 여간 고정하게 살지 않았다. 그것은 차승룡으로서 심히 존경이 가는것들이였다.

《전번에 흥남에 내려가 섭죽이라는것과 조개구이를 먹어보았는데 이... 가만 뭐라더라. 아이, 또 잊었네.》

《잉어회.》

차승룡이 일깨워주었다.

《이 잉어회도 특별한 맛이예요.》

옥산은 잉어국과 잉어회만 들면서 줄곧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너야 조선음식이라면 그저 다 좋다는거지.》

한윤호가 입을 삐쭉했다.

《좋은건 좋다고 해야지요. 난 조선음식이 제일이예요. 만들기는 좀 시끄럽지만.》

《그래서 흘레브만 먹겠구나.》

또다시 오빠가 빈정거렸다.

《그래요. 탄불만 죽지 않는다면 누가 밥을 먹지 빵을 먹겠어요?》

옥산의 말에 모두 즐겁게 웃었다. 그 말에는 모두 공감인듯 싶었다. 자리가 한결 흥성거리자 차승룡이 찾아온 용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국장동지, 내 섭섭한 소리 한마디 하랍니까?》

《하라구.》

영복은 자기네 지배인과 한윤호사이에 신중한 이야기가 오가리라는것을 눈치채자 차를 봐야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국장동지두 그렇구 관리국에서랑 왜 우리 강선을 이붓자식 취급하듯 합니까?》

《허허.》

차승룡의 신랄한 질문에 한윤호는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성강엔 원조자재건 수입자재건 국내자재건 풍청풍청 쥐여주면서 우리 강선엔 여간 린색하게 굴지 않습니다. 이게 어디 됐습니까?》

차승룡은 아직 정신이 말짱했으나 우정 취한척하면서 속에 있는 소리를 털어놓았다.

《모를 소리.》

《실례를 들랍니까? 이번에 고압관과 아연도판, 스레트를 배정한것만 보아도 그렇지요. 성강엔...

《됐소, 됐소. 성강, 성강하지 말라구. 남을 걸고 넘어지는건 좋은 품성이 못돼.》

한윤호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서인지 차승룡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그럼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제강소이야기나 합시다. 분괴압연복구에 달라붙었는데 축세기는 어쩌자는겁니까?》

《왜 제손으로 복구하겠다고 흰소리를 친 웅천이 있지 않소.》

《안됩니다, 절대로. 축세기용접에 쓸 용접봉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판에 복구가 다 뭡니까.》

차승룡은 어지간히 술기운이 오르자 부쩍 열을 올리였다.

《축세기소리는 하지도 마오. 그 소리를 들으면 술맛이 다 없어진다니까.》

한윤호는 독한 워드까 한잔을 꿀꺽 삼키고 눈살을 찌프렸다. 그는 지금도 정부대표단 수원으로 쏘련을 방문하지 못한것을 분하게 생각하였다. 만약 그때 자기가 쏘련을 방문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도 여전히 골탕을 먹고있는 중공업부문의 몇몇 중요설비는 이미 납입할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리웅천은 그러한 설비납입문제를 하나도 해결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잔뜩 궁지에 몰리니까 현대적인 가열로신설이요, 축세기 자체복구요 하고 크게 떠들어대는것이라고 넘겨짚고있었다.

(두고보자. 얼마나 성사시키는가....)

한윤호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럼 그 얘긴 그만합시다. 그러나 축세기를 용접할 특수용접봉은 꼭 수입해줘야 합니다.》

《이 사람이 아직도 외국의 원조에 대한 환상에서 깨지 못했군. 일부 일군들속에 쏘련의 원조에 대한 환상이 있단 말이야.》

한윤호는 방금 마시고난 술잔을 눈앞에 뱅글뱅글 돌리며 차승룡을 건너다보았다.

차승룡은 놀랐다. 한윤호답지 않은 말이였기때문이였다. 차승룡은 상대방이 그말을 진심으로 했는지 아니면 이죽거리며 한 말인지 알수 없어 그의 칼칼한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한윤호가 세모진 눈을 가늘게 뜨고 얄팍한 입술을 비죽거리는것을 보아 그가 한 말을 반대의 의미로 들어야 하겠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한윤호가 방금 한 말이 쏘련방문에서 돌아온 그날 정준택이 그에게 한 말이라는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한윤호는 정준택이 자기한테 모욕적으로 한 그 말을 늘 가슴에 품어두고 앙갚음을 할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는것이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한텐 특수용접봉, 스레트, 아연도판, 가스관, 중유관, 고압관, 고압바킹... 이런것이 당장 필요합니다. 이런것들이 없이는 분괴복구가 곤난합니다. 풀어주어야 합니다.》

처세술과 수완은 언제나 당면한 실리부터 중시하는 법이다. 처세술과 수완이 뛰여난 차승룡은 숱한 국가재산을 거머쥐고있는 한윤호를 구슬려 당면하게 걸리고있는것들을 해결받으려고 왼심을 썼다.

《리웅천이 보고나 달라고 하오.》

한윤호가 고집스럽게 되뇌였다.

《리웅천 그 사람이 고압바킹때문에 수압시험에서 실패하자 어찌나 바빠났던지 이제 와서는 백정까지 찾으려고 돌아다닌답니다.》

《뭐뭐 백정?》

《예, 백정이지요. 짐승을 잡아들이는 사람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전부터 가죽이기는 기술이 높았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그런 기능

 
강산 20-03-23 22:21
 
(위에서 계속)

그런 사람들이 예전부터 가죽이기는 기술이 높았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그런 기능자를 찾아서 고압에 견디는 가죽바킹을 해결해보자는거지요. 바킹으로 쓰는 가죽은 굳지도 무르지도 않은 굉장히 까다로운 물건인데... 기가 막혀서...》

한윤호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죽이기는 기능자라구요?》

돌연히 옥산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예, 그런 사람들이 희귀하기는 하지만 있다나 봅디다.》

《그런 사람들을 나도 잘 알아요. 전에 내동무의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했어요.》

《하긴 중앙아시아에서는 목축업을 많이 하니까...》

《제가 그런 기능자를 찾아보겠어요. 믿으세요.》

옥산은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만둬.》

한윤호가 마뜩지 않게 뇌까리고 다시 차승룡에게 물었다. 《3단복식가열로라는건 어떻게 되였소? 웅천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것으로 건설하겠다는 그것말이요.》

《설계중입니다.》

《누가?》

《신철이라는 젊은 동무가 하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뛰뛰한 소문도 돌아가고...》

차승룡이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한윤호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차승룡을 쏘아보며 물었다.

《신철이 그 사람이 밤중마다 깊숙히 감춰둔 무슨 설계인가 훔쳐본다는데...》

차승룡은 이번에도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슬쩍 말꼬리를 사리였다.

《어서 말하오.》

한윤호가 짜증을 내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것이 쏘련의 비밀도면인데 리웅천이 쏘련방문때 빈손으로 돌아오기가 창피하니까 그런것을 훔쳐내왔다고 합니다. 설마 그렇기야...》

차승룡이 자기의 속심을 조심스럽게 내비치였다.

《뭐 비밀도면?》

《글쎄 소문은 그렇지만 설마...》

차승룡은 리웅천이나 신철이 수상하다고 내놓고 말할만큼 경솔하고 수가 얕은 사람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을 주의깊이 들어보면 자연히 푼수에 맞지 않게 세계적인 가열로를 일떠세우겠다고 큰소리치는 리웅천이나 신철에게 의심이 가게 되여있었다.

차승룡은 담배연기를 들이켰다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엷게 벌린 입술사이로 천천히 내뿜는 한윤호의 전에 없이 심각해진 얼굴을 흘끔 치떠보았다.

《에에, 그 말은 그만합시다. 술맛이 다 없어집니다.》 차승룡은 이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덧붙이였다. 《하여간 신철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미타하지요.》

《그 동문 재간이 있지 않아요.》

부엌에서 음식그릇을 들고 들어오다가 차승룡의 마지막말을 귀결에 들은 옥산이 불쑥 대화에 끼여들었다.

《재간?》

차승룡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요? 그 동문 머리가 비상하고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해요. 나도 조국에 나와서 그처럼 훌륭한 동무를 처음 보았어요.》

차승룡은 놀랐다. 개방적이고 덜렁덜렁한 옥산임을 평소부터 잘 아는 차승룡이였지만 어디까지나 처녀인 그로서 한 총각에 대하여 이렇게 내놓고 추어주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옥산의 커다란 그 눈이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듯 한 그 까만눈에서 무엇인가 억제할수 없는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고있지 않는가.

차승룡은 그제야 옥산이 강선에 내려와서는 꼭 신철을 만나군 한다는것, 그들이 대동강기슭을 거닐며 산보까지 하군 한다는 말을 들은 생각이 뇌리를 쳤다. 그가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옥산이 안부를 물어본 단 두사람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신철이였다. 그리고보니 신철의 말만 나오면 그가 매번 정도이상으로 반응하던것도 다 까닭이 있었다.

(벌써 그런 사이가 되였는가?)

차승룡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차승룡이 못지 않게 놀란 또 한사람은 한윤호였다. 한윤호는 동생의 말과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동생이 신철이라는 알지 못할 청년과 보통사이가 아니라는것을 대번에 눈치챘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여서 각별한 애정을 기울여온 그는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였다.

《물론 신철동문 재간이 있지요.》

차승룡은 옥산의 말을 듣고 재빨리 자기의 의견을 수정했다.

《알게 뭔가. 설계를 똑똑히 검토하라구.》

한윤호는 위엄이 돋힌 목소리로 오금을 박았다.

차승룡은 밤이 깊어서 한윤호의 집을 나섰다. 칼바람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추운 겨울밤이였으나 얼근히 취한 차승룡은 추운줄을 몰랐다. 그는 승용차를 타고 강선으로 나오면서 방금 있은 일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되살리며 자기의 목적이 성취되였는가 하는것을 가늠해보았다. 물론 한윤호와 합의를 본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런 자리에서 그 어떤 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볼수도 없었다. 차승룡은 결코 그런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푼수를 모르고 헤덤비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만족하였다. 자기의 리해관계와 엉켜있는 권위있는 중앙기관의 유력자와 친교를 두터이한것이였다. 그리고 지배인인 자기를 우습게 보고있는 안하무인격인 리웅천이나 신철에 대한 불신의 검은 씨앗을 그 유력자의 심중속에 깊이 심어주었다. 차승룡은 언제나와 같이 결론은 다른 사람이 내리게 하고 자기는 그 결론을 유도해낼수 있는 암시만 해주는것으로 만족하였다. 현명한 사람은 불리할 때 빠질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놓는 법이다. 인생의 길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을수 있는것이다.

한편 한윤호는 차승룡이 떠나가자 지체없이 동생한테 신철이와의 관계를 따지고 들었다. 옥산은 오빠한테 구태여 숨길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신철이와 알게 된 전후사연을 다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 청년이 아주 훌륭하다는거지?》

한윤호가 동생을 쏘아보며 다시 확인하려는듯이 마뜩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훌륭한 청년이예요.》

옥산은 확신성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방금 강선지배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아.》

《편견이지요.》

《편견? 그래서 박순일서기관이 조국에 나온것도 만나지 않았느냐?》

한윤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만나고싶지 않았어요.》

《뭐, 뭐?》

《호호... 오빠, 나와 신철동무와의 관계는 오빠가 우려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니 마음놓으세요.》

《명심해 둬. 네 결혼은 내 승인이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는걸...》

《호호...》

《이건 봉건이 아니야. 조국에 혈붙이라고는 나밖에 없다. 알았느냐?》

《예예, 알았어요. 오빠, 오빠눈에는 내가 철없이 덤비는 계집애처럼 보이는게지요?》

옥산은 오빠의 리해부족에 어이가 없다는듯 그의 어깨를 껴안다싶이 하면서 장난기어린 어조로 말했다. 한윤호는 비로소 한시름 놓이는듯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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