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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선의 아침 제1회   20-01-13
강산   1,190
 



( 제 1 회 )

 

 

《장군님, 앞에는… 앞에는 최전선입니다.》

처녀전사는 울먹이는 소리로 안타까이 말씀드린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애어린 녀전사의 두손을 꼭 잡으시였다.

《전사동무, 고맙소. 고마와! 하지만 이 최고사령관은 전선으로, 우리 전사들을 찾아가야 하오. 이게 바로 전쟁승리로 가는 길이야.》

《장군님!》

이윽고 승용차행렬은 두손을 가슴에 꼭 모아쥐고 안타까움과 격정의 눈물을 흘리는 녀성군인을 뒤에 떨군채 도하장으로 전진해나간다.

총서 《불멸의 력사》중 장편소설《전선의 아침》은 미제의 무분별한 《금화공세》를 단호히 짓부시고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의 날을 앞당겨오신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김일성동지의 비범한 군사적예지와 통찰력, 탁월한 령군술, 불같이 뜨거운 조국애, 헌신적인 동지애를 감명깊게 보여주고있다.

싸우는 전사들을 찾아 불비 쏟아지는 최전선고지에도 찾아가시고 때로는 후방의 농민들과 함께 밭이랑에 씨도 뿌리시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마다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시는 어버이수령님.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품속에서 자라난 전선참모장 박정덕과 항일혁명투사 류경수, 신기철분대장과 박원진전사, 전무성과 김인정 등 수많은 군인들과 석강하, 박한주를 비롯한 종군작가들, 원화리의 김봉덕농민을 비롯한 후방의 인민들도 정의의 전쟁에서 빛나는 위훈을 떨쳐간다.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에 매혹된 형제나라 수반들과 인민들도 물심량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소설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력사적승리가 어떻게 이룩되였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어버이수령님의 조국과 인민, 혁명과 동지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힘에 의하여 전승의 아침이 밝아왔다는것을 사상예술적으로 빛나게 형상하였다.

 

편 집 부                    


 

주  요  인  물

 

박정덕 ㅡ 조선인민군 제74군단장, 후에 전선참모장

류경수 ㅡ 조선인민군 제73군단장

남  일 ㅡ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용건 ㅡ 민족보위상

박원진 ㅡ 조선인민군 전사, 대대장련락병

김인정 ㅡ 전선사령부 통신군관

윤애사 ㅡ 종군작가

리지아 ㅡ 《설악산2호》

리문철 ㅡ 최고사령부 특수정찰조장

김봉덕 ㅡ 원화리 농민

황계광 ㅡ 중국인민지원군 전사

월프레드 버체트 ㅡ 외국종군기자

《그》 ㅡ 미중앙정보국 테로성원, 《왕아바이》

릿지웨이 ㅡ 전임 미극동군사령관

클라크 ㅡ 후임 미극동군사령관

정일권 ㅡ 남조선군 2군단장  

 

 


제  1  편

 

                      가렬한 전투의 저기 저 언덕

                     피흘린 동지를 잊지 말아라

                           (전시가요중에서)

 

제  1  장

 

74군단장 박정덕장령은 재빛말에 박차를 가하며 웃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진눈까비가 달아오른 얼굴에 철떡철떡 달라붙는게 도무지 앞을 가려보기가 힘들다. 중낮에 군단지휘부를 나설 때는 겨울답지 않게 실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관하 사, 려단지휘관들과 함께 서천지역을 돌아보고 떠날 무렵부터 금시 흐린 하늘이 심술을 부려 진눈까비가 강산을 덮어버렸다.

군용비옷을 걸치긴 했으나 목덜미로 기여든 차거운 진눈까비물이 등골로 줄줄 흘러내리는게 척척하기 그지없다.

미제침략군의 함포사격과 비행대폭격에 마마자욱처럼 군데군데 패인 좁은 길은 온통 진창으로 범벅이 되여 말의 기운을 깡그리 뽑아버린다. 나이가 있어 몸을 아끼는 그놈은 헉헉 단김을 내뿜으며 가끔 걸음발을 늦추려 했다. 그때마다 박정덕은 박차를 가하군했다.

온천에서 마전채석장을 지나자 철현고개길이 시작되였다. 철현고개를 넘느라 말도 맥이 다 빠져버린 모양이다. 하긴 오늘만 해도 수백리길을 달렸으니 사람도 말도 지칠대로 지쳤다.

강서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황혼속에 대보산의 우중충한 자태가 뿌옇게 안겨온다. 눈에 선 길이라 말도 그냥 평보로 걷게 내쳐두었다.

무엇인가… 고요하였다. 진눈까비는 다시 성글어지다가 변덕스럽게 실비로 뒤바뀌여 얼굴을 다정히 쓰다듬는다.

(허, 정월에 비라… 계절도 지독스레 변덕을 부리는군…)

박정덕은 문득 온몸에 피곤이 무겁게 실리는것을 느끼였다. 저도모르게 마음의 탕개가 풀려버린다. 하지만 말우에서 존다는것은 위험한 일이다. 박정덕은 한손으로 눈을 부비였다. 고요하고 한산한 주변전경에 눈길을 주었다.

나지막하게 솟아있는 야산기슭을 따라 자리잡은 마을들에서 연기가 그물그물 피여오른다. 보슬비와 대지의 찬기운에 쫓기여 그것들은 거뭇해지는 공중으로 채 오르지도 못하고 뿌연 안개처럼 짙어가는 황혼속으로 잦아든다.

썩 멀리에서 불빛 한점이 외롭게 가물거렸다. 아마도 불빛막이를 잊은 어느 덜퉁스러운 농가인 모양이다.

불빛, 농가의 불빛…

이상하게 야릇하고 따뜻해지는 추억이 가슴속으로 비껴든다. 만질수도 종잡을수도 없는, 꿈결같은 그것은 거침없이 살며시 심혼속으로 스며든다.

농가, 석하리의 고향집, 초가이영, 가물거리던 등잔불… 그리고… 광야, 광야… 비바람,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수림과 잡관목들… 광야에 메아리치던 말울음소리, 말발굽소리…

번개치고 눈보라 울고 바람찼던 그 길, 정처없이 달린 그 길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났던가. 그것은 젊은 넋의 몸부림이였다.

그때도 저런 따뜻하고 고요한 불빛들이 그를 유혹했고, 미련없이 지나쳤고 멀리 뒤에 두고 또다시 새로운 방황의 길을 떠났었다.…

외로운 새는 몸부림쳤으나 나래를 퍼덕일 창공이 없었고 갈길 잃은 배는 폭풍속을 헤매며 항구를 찾았으나 등대가 비치지 않았다. 젊은 넋이 그린것은 안식의 항구가 아니였다.

해비치는 투쟁의 해안, 그토록 그려온 혁명의 품, 김일성장군님의 전설적인 빨찌산부대였다.

가고싶었던 길, 에돌아온 길, 닻을 내린 곳…

해방후에야 비로소 박정덕은 그처럼 그리던 태양의 품에 인생의 닻을 내리고 새 삶의 길을 찾았다.

고급지휘관강습소… 거기서 그는 혁명의 진리를 새겨안았고 장군님빨찌산의 우리 식 전법을 배웠다. 령장의 손길아래에서 쟁쟁한 군사가로 자라났다. 언제한번 군화끈을 풀어볼새가 없었다. 라남에서 새 부대를 맡아안았던 그는 군관사택마을의 온돌방에 엉치를 붙여볼새도 없이 미제의 전쟁도발로 남진의 길에 올랐다. 엄혹한 시련속에 입술을 깨물며 되돌아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길, 제2전선의 산발들에 더운 피와 땀을 뿌릴 때, 부상당한 몸으로 반돌격구령을 웨치며 첩첩한 포위를 헤칠 때 그가 바란것은 무엇이였던가.

총과 군복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인 젊은 심장에 꽉 차넘친것은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였고 바란것은 장군님의 안녕이였다.

그 믿음에 떠받들리우고 그 소원을 생의 좌우명으로 간직한채 지난해에는 서해안과 평양방위를 맡은 최고사령부직속 군단장으로 임명받았다.

평양방위,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혁명의 수뇌부 방위였으며 수뇌부방위는 위대한 장군님을 보위하는것이였다.

박정덕은 한순간도 이것을 잊을수가 없었다. 그가 헤매인 방황의 길과 찾음의 길, 그가 체험한 전쟁의 로정은 장군님이 없으면 이 조선이 없다는 철리를 심장 깊숙이 새겨준 로정이였다.

하여 그는 침입하는 적을 해안전방에서 소멸할데 대한 장군님의 작전적구상에 따라 제반 작전전술적방안을 모색해왔으며 오늘도 관하, 사, 려단장들을 이끌고 서천과 귀성포, 멀리 금당, 광량만쪽의 지형을 살피며 적 해상륙전대와 항공륙전대의 상륙 및 투하 예견지점들을 돌아보았다. 살펴볼수록 그는 가슴이 옥죄여들고 초조감과 불만이 살아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역시 서천지역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서해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서천은 화진천과 문흥천연안의 벌과 린접하여 평양의 천연울타리라고 할수 있는 오석산줄기를 바투 물고있었다. 예로부터 청개 혹은 영청이라고도 불리워온 이 고장은 해발고가 낮은 산들과 구릉들이 돌기돌기 얹혀있어 일단 적이 발을 붙이면 기갑무력과 보병대오가 진공하기에는 매우 유리하고 아군이 방어하기에는 아주 불리한 지역이였다. 박정덕은 말라버린 불그레한 바다풀들이 을씨년스럽게 서걱대는 간석지로 말을 몰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희뿌연 진눈까비사이로 북으로는 강룡산이, 남쪽 경계로는 그보다 좀 낮은 흑룡산과 봉수산이 어렴풋이 바라보이고 삼각지점을 이룬 곳에 불곡산이 희미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박정덕은 증산군쪽의 석다산앞에 사, 려단장들을 떨구어놓고 말을 달려 서천주위의 향현동, 화진리, 신송리까지 돌아보고나서야 귀로에 올랐다.

(서조선만의 가장 우묵진 곳인 서천으로부터 평양은 지척이다. 만약 미제침략군이 서해안에서 작전을 개시한다면 이곳보다 더 리상적인 상륙지점은 없을것이다. 적들이 이곳에 대한 해안상륙작전과 함께 평원벌에 공수무력까지 투하하여 협공해온다면 쉽사리 오석산줄기를 넘어 지척인 평양으로 밀려들수 있다.

석다산으로 림시 이동한 부대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보포간의 협동에 의한 화력체계를 강화해야 해. 갱도에 은페한 포들과 매복땅크들의 리용, 강룡산과 흑룡산사이에 교차화력구간을 조직한다면?…)

…말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바람에 박정덕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어둠속에서 두런두런하는 인기척이 났다.

어느새 군단지휘부가까이에 이른것인가.

눈여겨보니 검푸릿한 하늘을 원경으로 형제산의 낯익은 륜곽이 희미하게 안겨든다.

박정덕은 예리한 눈길로 앞을 쏘아보았다.

《아, 아군이군요. 여기 74군단지휘부가 어딥니까?》

거뭇한 형체가 반기는 소리로 물으며 다가왔다.

박정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선 먼 평양아근에서 《아군》소리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동무들은 누구요?》

일행은 여럿이였다. 밤눈에 익숙되여서인지 견장이 없는 군관복차림의 사람들속에서 하얀 얼굴의 호리호리한 녀성까지 알아볼수 있었다.

《우린 저 평양에서 떠난…》

누군가 말하다말고 머밋거리는것을 알아본 박정덕은 말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내 여기 군단지휘부사람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린 최고사령부에서 파견한 종군작가들입니다. 군단에서 전선사령부로 가는 차편이 있다기에…》

《아, 동무들이였구만. 문화선전상에게서 부탁을 받았소. 최고사령부의 지시도 있었구요. 갑시다.》

박정덕은 말고삐를 쥔채 앞장서서 걸었다.

《아이, 박정덕군단장동지가 아니십니까?》

반가움에 찬 맑고 초랑초랑한 목소리에 박정덕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흰 얼굴의 녀성이 그를 보고있었다.

《동문 누굽니까?》

《저… 윤애사라고 전쟁전에 여러번 뵈웠는데 모르시겠습니까?》

박정덕은 알아보았다. 얼굴모색에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로 알게 된것이다.

어느 모임에서였던가. 맑고 랑랑한 소리로 읊던 조기천의 시, 그때 종주먹을 흔들며 열정의 시어를 소리높이 읊조리던 애리애리한 처녀의 모습이 우렷이 살아올랐다.

《이거 정말 반갑구만. 윤동무를 여기서 만나다니. 한데 동무도 종군작가요?》

《군단장동지, 윤애사동무로 말하면 한다하는 신진녀류시인으로서 지난해 릿지웨이의 〈하기공세〉때에는 1211고지에까지 갔댔습니다.》

덩지큰 사람이 설레발을 치며 말하자 윤애사는 입을 싸쥐고 웃다가 함께 온 일행을 소개했다. 그 덩지큰 사람으로 말하면 박정덕이도 들은바있는 심봉운이라는 시인이고 대렬책임자라고 하는 석강하도 시인이였다.

박정덕은 문득 생각키우는것이 있어 물었다.

《그럼 〈섬멸의 길로〉를 쓴 시인이 아닙니까?》

《저… 그렇긴 합니다만.》

체소한 몸매의 석강하는 어색한 태도로 뒤덜미를 쓸어만졌고 다른 사람들 역시 머쓱한 기색이였다.

윤애사가 분위기를 눙치려는듯 밝은 어조로 말했다.

《군단장동지, 〈섬멸의 길로〉는 부르지 않게 되여있습니다.》

《부르지 않게 되다니?》

《군단장동지, 그건 사실입니다. 사상예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보급이 중지되였습니다.》

석강하라는 사람이 면구한 어조로 말하고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

《래일 아침녘에 출발하는것으로 합시다.》

박정덕은 《섬멸의 길로》에 대해 더 알고싶었으나 그럴 계제가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반토굴로 된 지휘부건물앞에 이르니 참모장과 작전직일관이 그들을 맞았다.

박정덕은 웃음어린 얼굴로 종군작가일행쪽을 향해 돌아서서 모두걸이로 한마디했다.

《오늘밤은 푹 쉬고 래일 다시 만납시다.》

때마침 뛰여나온 부관에게 군용비옷을 넘겨준 그는 작전직일관실에 들려 그간의 정황을 알아보았다.

사, 려단을 돌아볼 때 받아본 정황과 달라진것이 별반 없었다. 좀 새로운것이 있다면 인천쪽에 집결되였던 적수송함선들과 상륙정들이 초도쪽으로 기동을 개시했다는것뿐이였다.

그가 작전직일관실에서 복도로 나오자 뒤따라온 참모장이 다시 그 문제를 입에 올렸다.

《군단장동지,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치라니, 우리야 그에 대해 늘 준비태세에 있지 않습니까.》

박정덕의 배포유한 대답에 뚱뚱한 몸매의 참모장은 씩 숨을 내쉬고 뜨직뜨직 말했다.

《군사위원동지가 지금 그때문에 무척 신경을 쓰고있습니다. 좀전에도 군단장동지가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고…》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습니까?》

《부대배치를 다시 토론해보자는것입니다.

적수송함선의 기동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일찌기 가르쳐주신것처럼 우리측 해안에 대한 공격준비의 일환일것이고 그에 따라 만전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것입니다.》

《만전의 태세… 그야, 그때문에 우리가 있는것이고 지금껏 해놓은것도 그것이 아니요.》

《군사위원동진… 적들이 해안상륙을 시도한다면 항공륙전대의 투하도 예견해야 하니만치 일부 부대들을 평양가까이로 끌어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여기로?! 그러면 기본싸움을 해안지대가 아니라 평양근방에서 한다는거요?》

《예, 그런 면에선 모순되는 점도 있지만…》

《참모장동무, 그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평양쪽으로는 단 한놈의 적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것이 우리들의 임무요.

문제는 항공륙전대인데… 그것 역시 평양에는 접근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 참모장동문 현재의 부대배치에서 빈틈이 있다고 생각하오?》

《더 안전성을 기하면 좋지요.》

《물론 그렇지요. 이제 군사위원동물 만나겠습니다.》

박정덕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섰다. 요즈음 날이 갈수록 차국천군사위원과의 관계가 시원치 않음을 생각하게 되였다.

성격상 차이도 있겠지만 기본은 작전전술면에서의 의견차이가 서로의 관계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해 말 군사위원회에서 박정덕이 군단방어지역의 진지갱도화를 잘못한것때문에 책벌을 받은 뒤부터이다. 그때부터 차국천은 박정덕이 하는 일에 덮어놓고 의문을 붙이며 이러쿵저러쿵 잡다한 의견을 제기하는데 그 의견이라는것이 모두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과 방침집행을 위한것이라는데서는 공감이 가나 실천적인 면에서는 여러가지로 가당치 않은것이였다.

차국천이 있는 반토굴쪽으로 가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풍금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옛소학교 교사에 자리잡은 통신결속소의 한방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박정덕은 향교리의 교회당이 불탈때 건진 풍금을 녀성군인들이 이곳으로 날라오던 일이 생각났다.

풍금소리는 어쩐지 어둡고 비장하고 그런가 하면 애잔하고 구슬프게도 들렸다.

음악이 왜 저런가. 더 힘차고 밝고 우아한 곡조는 없는가. 저런 감상적인 곡을 타는건 누굴가.

그는 풍금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문쪽으로 다가갔다. 흐린 유리를 끼운 출입문을 열었다. 군모를 벗은 한 녀성군관이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풍금을 타고있었다. 통신결속소 군관 김인정중위였다.

박정덕은 순간 돌아설가말가 바재이다가 소리없이 소학생들의 낮은 걸상을 끄당겨 앉아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내적인 감정이 진한 곡조가 그의 심혼을 파헤치며 기여든다.

그는 어쩔수 없이 슬며시 눈을 감아버렸다. 생각에… 잠겼다.

광야, 어두운 광야, 깃을 찾는 새들의 우짖음소리, 침침한 하늘… 그는 말고삐를 잡고 사품치는 강가에 서있었다. 멀리 강건너 불타는 락조속으로 성시를 친 빨찌산대오가 사라져가고있다.

그는 아예 땅우에 퍼더앉아 멀어져가는 빨찌산대오를 향해 안타까이 부르고 또 불렀다.…

문득 풍금소리가 멎었다.

박정덕이 눈을 뜨니 김인정은 당황하다못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군단장동지, 전… 근무휴식중이였습니다.》

《일없소. 좀 더 타지. 참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풍금소리요.》

《…》

박정덕은 김인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참 동문 〈섬멸의 길로〉라는 노래를 아오?》

《네…》

《그 노래가 어떻소. 전사들이 즐겨 부르던데?ㅡ》

《저… 그 노래는 못부르게 되였다고 합니다. 요전번 군사위원동지가 알려주던데… 염전적인 노래라고 했습니다.》

《염전적인?… 동문 어떻게 생각하오.》

《너무… 비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 강조된것 같습니다.》

《죽음이라?!… 전쟁이란 죽고사는 싸움인데 죽음을 맞받아 싸운다는것이 나쁠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음… 허허… 그럼 왔던김에 밝은 노래나 좀 듣고 가기요.》

김인정은 주밋거리다가 다시 앉았다.

폭넓고 해빛처럼 밝고 랑만에 넘친 선률이 교실안을 흔들었다.

(리면상선생의 《산으로 바다로 가자》, 좋은 곡이지.…)

박정덕은 마음속이 푹 가라앉고 편안해지는것을 느꼈다.

《군단장동진, 이 곡이 마음에 드십니까?…》

《음… 인정동문… 전쟁전 음악학교에 다녔지?》

《네,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김인정은 풍금에서 손을 내리우며 가냘픈 어깨를 낮추었다.

《그런데 요즘 동무의 얼굴색이 왜 그렇소.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게 아니요?》

순간 김인정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박정덕은 그 녀자의 눈가에 물기가 반짝이는것을 보았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박정덕은 몸을 돌렸다. 입술이 퍼렇게 언 부관이 그냥 군용비옷을 든채 문가에 서있었다.

《군단장동지, 군사위원동지가 아까부터 기다리고있습니다.》

박정덕은 자리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가기요.》

군사위원 차국천장령은 차를 마시고있다가 찌뿌둥했던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오시길 기다렸소. 방금 참모장동무가 왔다갔습니다. 군단장동무까지 만나보고 최고사령부에 가려던참이였습니다.》

차국천은 우선우선하며 고뿌에 더운 차를 따랐다.

《사, 려단장들을 데리고 서천지역을 돌아보느라 좀 늦었습니다.》

박정덕은 차고뿌를 받아 탁우에 놓으며 걸상을 끄당겨 털썪 주저앉았다.

《내 아무래도 군단장동무에게 싫은 소리를 좀 해야겠습니다. 우리 위수구역을 알쭌한 후방으로 여기단 큰코 다칠수 있습니다. 왜 군단장동문 호위도 없이 그냥 혼자 다니는겁니까? 최고사령관동지의 당부를 벌써 잊었습니까? 부관까지 내팽개치고 돌아다녔다면서요?…》

《허허, 제 집마당을 돌아보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한데 난 군단장동무가 무엇때문에 방은 비워놓고 사, 려단장들까지 끌고다니는지 리해가 안됩니다.

지대료해, 부대료해는 몇십번 한것이고… 군단장동문 새로 조직된 대대들을 평양이 아니라 서천쪽에 배치할 의향을 표시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강산 20-01-13 19:23
 
(위에서 계속)

군단장동문, 평양보다 서천이 더 중요하다는겁니까?》

《서천이자 평양입니다.》

박정덕은 또다시 부질없는 론쟁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아닐세라 차국천은 모가 진 눈을 쪼프리고 한참 갑자르더니 부드럽게 말을 떼였다.

《물론 난 군단장동무의 말뜻을 리해합니다. 서천이 평양의 관문으로 되는것만큼 거기서 적을 제압타격소멸해야 한다는것이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작전방침에 맞는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관문을 강화한다면서 평양방어를 소홀히 하는것은 위험합니다.》

《군사위원동무, 우린 평양에 단 한놈의 적도, 단 한발의 포탄도 날아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서천지역에 강력한 거점을 형성해야 합니다. 지금 있는 력량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서천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적해상륙전대가 노리는 곳입니다. 서해안 방어에서도 여기가 초점입니다.

이에 대해선 이미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여러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순간 차국천의 얼굴색이 시퍼래졌다.

《여보, 군단장동무, 그걸 내가 무시한다고 했소? 바로 그래서 나역시 해안방어려단이 지키고있는 석다산계선에 한개 대대를 더 파견하자는데 동의한게 아니요. 지금 전선은 지난해 적의 〈하기 및 추기공세〉이후 거의 고착상태에 들어가고 판문점에서 진행되는 정전담판도 비록 힘겹게 이루어지지만 거의 모든 의정들을 합의보았소. 이제 남은것은 군사분계선 확정과 포로송환문제뿐이요. 며칠전에 남일대장을 만났는데 희망이 없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명백한건 적들이 지금 지칠대로 지쳤다는것이요. 지난해 10월 밴플리트가 동해안 통천지구로 상륙하여 전선을 금성ㅡ평강ㅡ통천계선까지 밀어올리자는 〈해시계작전〉이라는것을 제기했을 때 릿지웨이가 〈승산없는 모험〉, 〈희생을 보상할수 없는 계획〉이라고 기각해버린것만 봐도 그렇고 그후 릿지웨이가 미8군에 정식 〈방어에로의 이전〉을 명령하면서 공격은 〈현전선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작전〉 또는 〈빼앗긴 지대를 탈환하기 위한 역습〉에 국한시키라고 지시한것을 봐도 놈들이 기진했다는건 명백하단 말이요.

사실 우리 전사들도 지쳤소. 휴식이 필요하단 말이요. 사람의 육체가 쇠덩이가 아닌이상 한계가 있지 않소?

우리 군단이 맡은 서해안방어지대들에 갱도진지를 기본적으로 굴설해놓았는데도 군단장동무는 당장 큰 일이라도 날것처럼 방어진지를 보강한다, 부대들을 배비변경한다 하면서 전사들을 들볶아대니 그들이 좋아하겠소?》

《잘 리해되지 않는군요. 방금 참모장동무는 군사위원동무가 적함정들이 초도쪽으로 기동하는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고 하던데ㅡ》

《그건 사실이요. 하지만 난 적들의 그런 놀음이 우리 서해방어연선에 대한 상륙기도라고는 보지 않소. 보다 음흉한 공격을 노린 기만작전일수 있지 않소. 다른 지역에서 특공대나 항공륙전대에 의한 불의적역습을 꾀할수도 있지 않소.》

박정덕은 그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솟구치는 불만을 묵새길수 없었다. 그가 군단장으로 서해안과 수도방위를 맡은 때부터 제일 중시해온것이 바로 그런 특공대와 륙전대들의 침습에 대처한 작전방안이였고 준비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릿지웨이가 지난해 11월 관하 사단장들에게 공세준비를 갖추어놓을데 대해 명령한 사실을 스쳐보내서는 안됩니다. 또한 릿지웨이의 직속 〈합동전략계획작전반〉이 원산ㅡ평양선을 전선으로 하는 공세계획안을 짰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세계획안이야 20만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것이여서 미극동공군사령관이나 극동해군사령관도 반대했고 합동참모본부의장 브랫들리까지 비난해서 그만둔것이 아닙니까.》

《적들이 어제 포기했다 해서 오늘도 포기한다고 볼수야 없지 않습니까. 릿지웨이가 제아무리 얻어맞고 주눅이 들었다 해도 쉽사리 꺾일 놈은 아니라는것입니다. 특공대나 항공륙전대따위로 집적거리는 놀음보다 더 엄청난 모험을 할수 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옳소. 내가 말하자는것도 그것이요. 대적이건 소적이건 덤벼들면 쳐야 되는데… 지금 상태에서 력량을 분산시키면 어떻게 되겠소. 력량분산은 곧 화력분산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겠소. 쓰딸린그라드방위전투를 생각해보시오. 그때 모든 전후방의 사단을 스딸린그라드에 집중시킴으로써 도시를 지켜낸것이 아닙니까.》

《군사위원동무, 지금 우리 전선이 평양으로 옮겨졌습니까? 우리가 지금 퇴각하는 상태인가 말입니다.》

박정덕은 자기를 걷잡기 어려웠다.

차국천은 놀란 눈길로 그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박동무, 난 군사위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하는 말이요. 우린 첫째도 둘째도 평양, 평양을 사수해야 되오.

동무나 나나 장군님 계시지 않는 조국을 생각할수 있소?》

박정덕은 모자를 벗고 땀에 젖은 굽실굽실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만졌다.

차국천의 론리가 심한 모순으로 가득차있지만 그의 마지막말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가슴을 울려주었던것이다.

《우린 지금… 호상간 리해에서 착오가 있는것 같은데 견해상 출발점과 지향은 같다고 봅니다.

단지 방법에서의 차이라고 할가.

나로 말하면 대문밖에서 적을 치자는것이고 군사위원동무로 보면 뜨락에서 싸우자는것인데… 그에 대해선 동의할수 없습니다.》

《여보, 난 그런 형상적인 표현을 질색하는 사람이요. 내 당 전권대표로서, 또 함께 54사때부터 생사를 같이 해온 전우로서 꼭 말해주고싶은것은 군단장동무에게서… 소총명과 개인영웅주의가 머리를 쳐든다는것이요. 자신의… 처지도 생각해야지요. 이만합시다.》

《?!…》

박정덕은 한순간 머리를 짓수그리고 컴컴한 얼굴로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군사위원이 이렇게 드러내놓고 책벌문제를 내비치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박정덕이 침묵에 빠지자 차국천은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별안간 옹색해져가지고 차고뿌를 한옆에 밀어놓기도 하고 사업수첩을 의미없이 번지기도 하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는 품에서 유표한 은색라이타를 꺼내들고 철컥철컥 불을 켜댔다.

박정덕은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갱도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군사위원회에서 책벌을 받던 일이 아프게 떠올랐다.…

그날저녘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덕을 데리고 담바우산앞 등성이에 올라가시였다.

그이께선 부관들에게 내가 조용한데서 이 동무와 얘기할것이 있으니 따라오지 말라고 이르시였다.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산등성이로 오르시는 그이의 뒤를 따라 걷는 박정덕은 얼굴을 들수 없었다.

평소에 그는 군관용가죽장화가 그리도 무거운줄을 알지 못하였다. 연추를 매단듯 한 발걸음 못지 않게 마음 또한 더없이 무거웠다.

장군님의 신임에 보답할 대신 그이께서 또 걱정을 하시게 하였으니 이 막중한 죄를 어떻게 씼겠는가.

담바우산 등성이에 오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둠속 멀리 마을쪽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서계시였다.

그곳에서 가물가물 등잔불이 반짝이고있었다. 그것은 고향집을 생각케 하는 불빛이였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 박정덕에게 물으시였다.

《어머니가 의주에 있다고 했지?》

《예…》

《어머니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군 하오?》

《…》

박정덕은 대답을 드리지 못하다가 전쟁전에는 해마다 년하장을 집으로 보내군 하였는데 전쟁이 일어난 후부터는 한번도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얼마나 기다리겠소. 동무는 장령이 되고 군단장이 되였으니 고향집의 어머니나 후방의 안해한테 언제 주의를 돌릴 겨를이 없다고 자신을 위안할테지… 하지만 그러면 안되지. 안되구말구.》

고개를 숙이고 덤덤히 서있는 박정덕에게 그이께서는 또 물으시였다.

《동문 적들의 폭격이 시작될 때 어머니를 생각해봤소?》

박정덕은 미처 대답을 올릴수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선 가슴아픈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우리의 공군력량은 너무도 부족하오. 나는 전사들이 쓰러지면서 우리의 비행기를 부른다는 보고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기는것 같소. 앞으로 우리 후대들은 이런 싸움을 하지 않을것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전쟁에서 우리 지휘관들에겐 이기는 싸움을 하는것과 함께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있소. 그것은 전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것이요.

나는 적들로부터 폭격을 당할 때마다 어머니들을 생각하군 하오.

어머니들은 폭격이 시작되면 전선에 나가 있는 아들들을 걱정할거요.》

김일성동지께선 강반석어머님과 마지막으로 헤여지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이께서 내도산의 빙천설지를 헤쳐가시다가 신발속에서 어머님의 따스한 달비를 발견하고 눈굽을 적시던 이야기를 하셨을 때 박정덕은 돌아서서 오열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의 어머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심장을 지닌 녀성들이요.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맡긴 귀중한 아들들을 책임진 우리가 갱도공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적의 타격으로부터 병사들을 잃게 된다면 그 어머니들앞에 무슨 체면으로 나서겠나?

내가 박정덕이를 신임한것은 단순히 동무가 전개력이 있고 머리가 좋은것때문만이 아니요. 동무가 후퇴때 사단의 병사들을 그 사지판에서 한사람도 떼놓지 않고 전선을 넘어온것이 제일 기뻤소. 우리 지휘관은 그래야 하오.

그런데 지금의 박정덕은 어떠한가?!…》

그이께서는 계속 말씀하시였다.

전쟁에서 유생력량의 소모와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일반공식을 우리는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작전과 전투는 먼저 귀중한 군인들의 생명을 첫자리에 놓고 작성되고 진행되여야 한다, 설사 적유생력량 100명을 살상한다 해도 우리 전사 한명이 희생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 우리 전사들이 지닌 생명의 가치는 수백, 수천의 적과도 바꿀수 없이 값높고 신성한것이기때문이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듯 한 소리에 두사람은 동시에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겨울비방울들이 창문을 두드리고있었다. 이해 겨울은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문득 박정덕은 한숨을 내쉬였다.

 

×

 

모든것이 삽시에 끝나버리고 김인정은 이 세상에 홀로 남은듯싶었다.

전쟁은 가혹하게도 그 녀자에게서 가까운 모든 혈육들을 사정없이, 깡그리, 무자비하게 앗아가버렸다.

전선에서 군관이였던 오빠 김광선의 전사소식이 날아든 그 가슴떨리는 가을로부터 내내 흰옷 입으시고 짬만 있으면 마을앞 남으로 뻗은 동구길에 홀로 서계시군 하던 어머니는 초겨울의 어느날 밤 미제침략군의 함포사격에 그만 잘못되였다.

…발랄하고 리지적이고 어찌보면 마음이 물러 동갑내기들로부터 자주 《언니》라고까지 불리우던 김인정은 갑자기 불행과 재난의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우자 별안간 전혀 낯선, 범접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녀자로 변모되여버렸다.

…그것은 조국보위후원회에서 밤늦도록 초모생들의 대렬명단을 정리하고나서 집으로 총총히 걸음을 다그치던 밤길이였다.

무엇인가 영문모르게 가슴이 짓눌리고 마음이 조급해지고 자주 돌부리에 발이 걸채이였다.

북방의 차거운 바람이 동해안쪽에서 불어쳤다.

그때 왜 그처럼 마구 달렸던가? 동구길에 홀로 서계실 어머니때문이였는가? 짙어가는 겨울밤의 고독감과 외로움때문이였는가?

파도소리와 함포소리, 음산한 하늘 그 어디에도 불빛 하나, 별빛 한점 찾을수 없던 그 밤에 그의 운명이 홱 뒤바뀌여버렸다.

피투성이 된 어머니의 시신, 어머니의 그 시신을 마을 뒤 야산에 안치한 후 전선파견장을 손에 쥐고 소꿉동무들의 서먹한 바래움속에 화물차에 올랐다.

아, 아, 꿈많던 소녀시절이여.

너는 영원히 지나가버렸구나.

너는 스무살을 넘겼어도 지금까지 소녀였다. 철저한 소녀였다.

평양의 그 준엄한 여름 학우들을 전선으로 바래우면서도 입가에 찍힌 웃음을 다는 거둘줄 몰랐었다.

전선후원사업과 민청의 분공수행과 대학소개사업에 치우치면서도 잃지 않았던 그 활력으로 고향에 돌아와 조국보위후원회의 핵심으로 동분서주하며 연설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리기도 했으나 그때까지도 너는 그저 다 큰 아이였다.

이 전쟁이 너와 얼마나 가깝게 인연을 맺고 너를 질책하고 너를 노엽히고 눈뜬 소경인 너를 채찍질했는지, 너는 전선으로 향한 렬차를 타고서야 인생의 가장 값진 눈물을 똘랑똘랑 떨구며 깨달았지.

…그 전선행렬차에 올랐을 때에야 김인정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었다.

희끗희끗한 상처입은 산천을 바라보며 그 녀자는 승강대에 기대여 상념에 잠겼다.

렬차는 어둠을 뚫고 전선으로 질풍같이 달렸다.

기적소리도 없었다.

그저 들리느니 기름 샌 완충기들의 삐걱거림소리와 바람소리뿐이다. 왜 저녁부터 울리던 유쾌한 전사들의 노래소리도 없는가. 왜 하늘을 썰며 돌아치던 폭격기떼의 앙칼진 소음도 사라졌는가.

김인정은 뒤를 돌아볼수 없었다.

그 뒤, 생활의 저 뒤, 고향과 부모형제가 있던 곳, 삶과 행복이 숨쉬던 곳.

어느때든 그 녀자가 인생의 그 뒤구간으로 돌아갈수 있을가?

거기에는 사랑과 우정, 진심과 희망이 있었고 애모쁜 속삭임과 랑만의 채광이 있었다. 다정한 학우들, 대학기숙사 그리고 축구경기장, 문수봉의 애어린 나무모, 철학부의 그 미남자, 소비조합화물차… 하지만 이제 그 모든것은 지나가버렸다.

끝나버린 서정시, 막을 내린 무대다.

그렇다면 너의 가슴도 비여버렸는가?

그 우정, 그 사랑, 그 사연도 다?…

나는 이제 녀자가 아니다.

녀자라면 날강도 미제를 이 땅에서 무자비하게 쳐없애야 할 복수의 녀신일것이다. 사랑은?… 그무엇도 영원할수 없다.

가슴속엔 오직 복수와 증오만이 서리차게 남았을뿐이다.

지나간 생활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김인정의 두눈이 무섭게 번쩍이였다.

했어도 통신병훈련을 받던 첫시기 마음이 여리여질 때 철학부의 그 동무에게 몇자 썼다. 그 녀자의 마음에 애오라지 남아있는 한줄기의 등불빛… 일사천리로 쓴 답장이 날아왔다. 야전엽서를 든 손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그것은… 우스개와 전투위훈담을 늘어놓은 끝에 죽도록 보고싶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를 써놓은 편지였다. 김인정은 편지를 든채 신병훈련소마당가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를 악물었다. 그 녀자는 자기가 보낸 편지에 신상에서 일어난 일을 단 한줄도 쓰지 않았다는것을 굳이 잊고있었다. 아니, 사랑의 심장은 모든것을 본다, 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비로소 그 녀자는 자신의 심장, 마음속에서 가물거리던, 바라고 의지하고 찬가슴을 더웁히고싶던 등불이 꺼졌음을 깨달았다. 아 아, 사랑은 없다, 그건 재가 되였어, 전부…

…험난한 전선길, 그 길에서 그 녀자의 심장은 강철로 굳어졌다. 제2전선의 산발들, 야전우편소 그리고 화염이 치감기던 통신실, 끝없는 행군, 불타는 도하장, 전사들, 사람들… 그속에서 과거의 모든것은 철저히 잊혀졌다.…

김인정이 군관으로 제발되여 74군단에 조동되였을 때 김광선의 전우였던 박정덕장령은 그의 손을 마주잡고 다소 의아해하며 놀란 빛이 서린 눈을 흡떴다.

손이 차서가 아니였다. 해쓱한 그의 얼굴에서 번뜩이는 그 마른눈빛이 지나간 시절 회령보안서장을 하던 김광선과 함께 학교기숙사에 찾아갈 때마다 팔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던 그 발랄하고 공상적이고 천진하던 소녀의 매혹적인 쌍겹눈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고 낯설기때문이였을가?…

형제산기슭의 군단지휘부, 불타버린 산과 들에 단풍이 타던 시절이였다.

함께 서있던 군사위원 차국천만은 호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인정의 등을 두드려주고나서 자못 유쾌하게 말했다.

《여보, 군단장동무. 우리 군단에 운이 텄소.

이런 미인이 우리 통신군관이라는걸 알면 다들 탐낼거요. 아주 잘됐소. 이건 길할 징조요! 하하하.》

피할수 없는, 운명적인 상봉도… 있었다. 먼발치에서 지나간 시절 심장의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잡았던 그 《축구선수》철학부 학생을 알아보는 순간… 김인정은 자기의 가슴이 그처럼 쇠덩이같이, 아니 돌덩이 한가지로 굳어져버린데 놀랐다. 그 남자, 지금은 군단장의 부관인 전무성이 마치도 소꿉시절의 평범한 동무처럼, 퇴색한 사진속의 범상한 인간처럼 느껴진것은 무엇때문일가?…

피했다. … 돌아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게 언제였던가? 소연한 가을비소리…

군용모포를 뒤집어쓰고 반토굴집에 엎디여있는데 쌍태머리교환분대장이 들어와 어깨를 흔든다.

《언니… 야, 저기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응?…》

김인정은 와닥닥 놀라 일어났다. 면내의바람으로 쌍태머리녀성군인을 쳐다보았다.

어둠속에서 교환분대장이 눈을 반짝이고있다.

《호호… 미남자군관, 아까부터 언닐 찾아달래요…》

뙤창으로 머밋머밋 다가갔다. 토굴밖에 그가… 서있었다. 비옷도 쓰지 않은채 후줄근해서 담배를 빨고있었다. 가을비에 젖어 담배불이 꺼지는지 가끔 손을 오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라이타를 절컥거린다. 라이타불비체 낯익은 정깊었던 얼굴이 얼핏 비껴든다. 굳어진, 초조감이 푹 내밴 군살이 전혀 없으나 단정하고 조화로운 철빛얼굴… 그것은… 퇴색한 옛 사진속의 애인의 모습이 아니였다. 조가비에 《모래밥》을 담고 풀잎으로 《찬거리》를 만들며 잔치놀이 싱갱이질을 하던 아득히 먼 소꿉시절의 짜개바지동무도 아니였다. 아 아!…

김인정은 넋을 잃은채 뙤창밖의 젊은 군관을 하염없는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그 순간 전무성이 축축히 젖은 담배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한숨을 내쉰다. 체육인다운 넓고 억센 어깨의 가벼운 오르내림… 그것은 몹시도 낯익은 자세였다.

불쑥 김인정은 가슴이 알싸해왔다. 이름할수 없는 따뜻한것이 슬며시, 뜻밖에, 어쩔새없이 마음 한구석을 꼬집으며 쓰리게 한다.… 그것이 젊은 사나이의 《리기주의》라고 너그러이 리해하고도 싶었다.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나에게 있어서 저 《축구선수》, 한때 사모와 애모쁜 정으로 이어진 저이말고 누가 더 있는가?… 일제때 평원군청의 소제부, 해방후 마을의 첫 축구선수… 철학부, 대학별 축구대항경기… 영원한 《응원대장》… 문수봉, 그 어린 나무모, 잃어버린 구두…)

잊으려 했던 지난 생활이, 그 화려한 나날의 공상적인 모든것들이 두주먹을 불끈 쥐고 그 녀자에게 밀물처럼 막 달려든다.

《아!…》

김인정은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교환분대장이 눈이 둥그래져서 달라붙는다.

《언니…》

《성희동무… 비옷을 내다줘. 그리고… 몸이 불편하다고…》

교환분대장의 가느다란 눈에 불꽃이 팡긋 일었다.

《알겠어요, 중위동지. 내가 쫓아버리죠!》

밖으로 나간 교환분대장이 비옷을 내밀며 뭐라고 종알거리자 전무성은 돌처럼 굳어지더니 그냥 휙 돌아섰다.……

저벅저벅 군단지휘부쪽으로 걸어가버린다.

김인정은 뙤창가에 서서 눈물속에 비로소 가냘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정말 미소일가?

(무성동무, 날 리해해주세요. 그사이 오해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기전에는 만나지 맙시다. 후에는… 모르겠어요. 녀성 김인정은 전승의 그날까지 없어요. 하지만 군관 김인정은 당신앞에 언제든지 서있습니다. 우리는 … 서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지나간 생활… 행복했던 시절, 그건 꿈입니다. 우리는 지워버릴수 없는 피의 언덕을 넘어왔습니다. 우정과 사랑, 리상과 공상… 그 모든, 제 몸에 걸쳤던 장식치레품들은 그 언덕을 헤쳐오며 다 타버렸습니다. 깡그리, 재도 안남았습니다. 내 마음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게 없습니다. 언젠가 본 시의 글발이 떠오릅니다.

 

사랑은 주고 또 주어도 가슴에 남아있고

사랑은 받고 또 받아도 가슴은 비여있네…)

 

김인정은 목놓아 울고싶었다. 자기의 아름다운, 구김살 없었던 《소녀》시절을 울며 《장례》지내고싶었다. 《복수의 녀신》은 끝내 자기를 이겨내고야말았다.

…어떻게 되여 김인정이 그토록 멀리했던 그것에로, 풍금같은것에 다시 현혹되였는지 그자신도 도무지 알수 없었다.

통신결속소앞에 있던 옛 교회당이 폭격에 맞은 날 저녁 처녀병사들이 그것을 날라왔다.

교환분대장이 새로 나온 노래를 배우자며 끈질기게 부탁하기에 조률을 해주다가 저도 모르게 건반을 눌러본것이 문제였다.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옹쳤던 실마리가 풀리듯, 몽쳤던 구름이 흩어지듯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 폭발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선률을 타고 쏟아져나왔다.

그것이 그 녀자의 마음이였는가?

애수였는가?

둘러선 녀병사들이 생각에 잠겨 풍금을 타는 김인정을 놀랍게, 고맙게 여겨보고있었다.

《언니…》

교환분대장이 기가 찬듯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밖에서는 그때 보슬비가 내리고있었다.

조락의 계절이 시작된 상처입은 대지에 따뜻한 보슬비가 다정히, 꾸준히 내리고있었다.

그 녀자의 마음까지도 그 때늦은 보슬비가 적시고있었던가?…

 

×

 

전승동(현재의 명칭)의 소회의실 바깥마당에서는 검은빛모직외투차림의 홍명희부수상이 울분에 차서 기염을 토하고있었다.

《…국제법상 전쟁은 민간인들에게는 철알을 날리지 않게 되여있어. 문명이전의 야만시대에는 닥치는대로 죽이는것이 전쟁이였지만 어디까지나 싸움은 군사와 군사의 승부가 아닌가. 한데 이 미군이라는 잡것들은 야만시대로 완전히 되돌아갔어. 임진란때의 왜구들도 혀를 두를 지경이야.

엥이, 고현놈들!》

세균탄피해지역인 안주, 성천지구를 돌아볼 때 들고다녔던 그의 개화장이 허공을 찌르기도 하고 땅바닥에 각인을 찍기도 했다. 그때마다 갱핏한 얼굴의 강마른 살편들이 철편처럼 떨렸다. 그와 함께 피해지역을 돌아봤던 중앙녀맹위원장 박정애는 입술을 꼭 사려문채 회의실문쪽을 보기도 하고 모란봉쪽 하늘을 살피기도 하는데 방금전에 홍명희에게 무엇때문에 지방출장을 가셨댔느냐고 묻던 문화선전상 허정숙과 회의실 문전보초인 말쑥한 군관복차림의 군인은 언제나 온유하고 점잖던 부수상로인의 폭발적인 분노에 두눈이 휘둥그래져 귀를 기울이고있다.

《그런즉 우리의 선전사업은 미제를 발가벗겨 두드려패는 창칼이 되고 불길이 돼야 해. 이번에 이 박녀사도 국제평화단체들에 고발장을 날리겠다고 하는데 옳아. 글쎄 벌레와 세균까지 보내 사람잡이를 하는 저 미국증생들을 뭐라고 해야 되나.》

홍명희는 참담한 얼굴빛으로 한숨을 내짓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문화선전상은 무엇때문에 일루 왔지?》

홍명희가 문득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허정숙은 당혹한 표정이였다.

《장군님께 종군작가들의 창작실태를 보고드리고 가르치심을 받으려구…》

순간 홍명희의 눈살이 꼿꼿해졌다. 불만스럽게 번쩍이는 그의 눈길이 박정애에게 멎었다가 다시 허정숙에게 옮겨졌다.

《장군님께서 예 계신다는건 이 녀맹위원장한테서 알았나?》

《예, 제가 말해줬습니다.》

박정애가 대답했다.

홍명희는 혀를 찼다.

《에이, 녀자들의 입이란… 지금 분초가 새로우신 장군님이신데 그래 그런 일로 귀중한 시간을 또 뺏아야 하겠나.》

허정숙이 기여드는 소리로 대답했다.

《저… 장군님께서 바라시는것이기에… 하긴 제가 불민했습니다.》

《그래 불민이지. 전선에 나간 종군작가들의 활동이야 잡지와 신문에 실리니 장군님께서 다 아실거구. 전년해 6월에 작가, 예술인들과 하신 담화를 학습했으면 일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건 명백한게 아닌가. 그리구…》

뒤말을 생각하는듯싶던 홍명희가 소회의실 문쪽을 보며 황급히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회의가 끝났어.》

아닐세라 회의실문이 열리며 한 군관이 나타났고 뒤이어 김일성동지께서 최용건과 김일, 남일을 비롯한 여러 군사위원회성원들과 함께 문밖으로 나오시였다.

《아, 홍명희선생이 오셨구만.》

김일성동지께서는 빠른 걸음으로 홍명희쪽으로 다가오시였다.

《장군님, 그동안 귀체만강하셨습니까?》

홍명희가 허둥지둥 마주나가며 허리굽혀 인사를 올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밝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언제 도착했습니까?》

《시내에 들어선건 한시간전이고 여기 온건 반시간 채 안됩니다.》

《그러니 반시간이나 예서 기다리셨군요. 왜 회의장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군사위원회를 소집한것은 아셨겠는데-》

《죄송합니다. 지각생의 체면에 차마-》

《하여튼 선생이 무사히 오셨으니 됐습니다. 객지에서 여러차례 폭격을 겪으셨겠는데…》

《예, 하지만 이젠 그따위 폭격에 미립이 터서… 너무 근심하지 말아주십시오.》

《숙식이랑 불편한 점이 많으셨지요?》

《웬걸요. 장군님께서 이 중앙녀맹위원장을 보좌로 붙여주셔 아무런 불편도 없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애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시며 집무실로 가자고 하시였다.

그러나 홍명희는 긴장한 낯빛의 최용건과 남일을 띄여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장군님, 전… 장군님 존안을 뵈웠으니 그만 물러갈가 합니다.》

《하긴… 집에도 못들리셨겠지요?》

《예, 세균탄 피해지역을 돌아보다가 군사위원회소집소식을 전갈받고 바삐 온다는게 오는 도중에 또 공습을 몇번 겪다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

홍명희부수상은 보건사업과 방역사업을 담당한 군사위원회 위원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세균탄소리를 할 때 홍명희의 눈에서 부시불같은것이 번쩍이는것을 보시며 로인의 심정을 아프게 할 질문을 피하기로 하시였다.

《가셨던 일은 후날에 듣기로 합시다. 사실 오늘 열린 군사위원회에서는 선생을 기조토론자로 내정하였댔습니다.

이제 군사위원회결정과 지시문이 하달되겠지만… 적들은 지금 우리 후방에 대한 〈초토화〉를 목표로 한 〈교살작전〉을 벌리고있습니다. 이에 대처하여 보건방역사업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도 토론되였습니다. 선생이 하셔야 할 말씀을 제가 대신했는데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원 장군님두, 장군님께서 말씀하셨으면야… 제사 미안합니다.》

《홍선생, 우리 모두 마음의 준비를 더 든든히 하여야겠습니다. 그전에도 여러차례 강조했지만 후방강화 특히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지키는것은 올해 우리앞에 나선 최우선과업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장군님, 명심하고있습니다. 미흡하나마 최대한 열심을 기울이겠습니다.》

《그래주십시오.》

그이께서는 적들의 세균전에 대처하여 조직한 비상방역위원회사업을 잘해나갈데 대해서와 무상치료제실시와 관련된 몇가지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인 박정애도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겠다고 하시였다.

《전재고아문제와 애육원사업은 전적으로 박정애동무가 맡아야겠소.》

그이께서는 송구스런 기색으로 서있는 허정숙에게 시선을 옮기시였다.

《문화선전상동무는 어떻게 나타났소?》

허정숙은 홍명희를 얼핏 보고 기죽은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전선에 파견한 종군작가들의 활동을 보고드리려구-》

《혹시 무슨 상서롭지 않은 일이 생긴게 아니요?》

《아, 아닙니다. 바쁘신 때에 제가 와서-》

허정숙은 또다시 홍명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홍명희가 벙글써 웃으며 김일성동지께 말씀드렸다.

《이 문화선전상이 주눅이 든건 제탓입니다. 더퍼리때를 채 벗지 못한것같아 좀 일렀지요. 쇠쇠한 일까지 들고다니며 장군님께 부담을 끼치면 되겠는냐고 말입니다.》

《홍선생, 그것이 왜 소소하겠습니까. 선생도 문화선전사업의 중요성을 잘 아실텐데. 그때문에 〈림꺽정〉이랑 숱한 책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며칠전에 내 류경수군단장한테 종군작가들을 보내겠다고 했더니 전사들이 기뻐할거라고 좋아했습니다. 난 허동무가 풀이 죽었길래 속이 다 덜컥했습니다.

선생도 요즘 전선에 나간 작가들의 글을 보시겠지요?》

《예, 다들 피가 뛰는 글들을 쓰더군요. 안룡만이, 박세영이, 황건이… 참, 내가 잘 모르는 석강하라는 사람의 시도 꽤나 가슴을 울렸습니다.》

《선생이 좋다고 하니 나도 기쁩니다.

전쟁에서는 글도 총폭탄 못지 않게 중요하지요.

허동무, 내가 오늘 일이 바빠서 그러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래일 오후로 미루자구.》

김일성동지께서는 군사위원회참가성원들이 그냥 밖에 서있는것을 보시고 어서 차에 오르라고 하시였다. 그리고는 홍명희의 팔을 껴잡고 그의 차에까지 가시였다.

《홍선생, 오늘은 푹 쉬면서 로독을 푸십시오.》

홍명희의 눈시울이 대번에 붉어졌다.

《장군님, 장군님께서도 부디 안녕하시여 옥체를 귀히 보존하십시오. 낮에는 될수록 움직임을 삼가하시고…》

《명심하겠습니다.》

잠시후 김일성동지께서는 남일과 함께 최고사령부가 자리잡은 건지리로 향하시고 최용건은 조중련합사령부가 자리잡은 회창을 향해 떠났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담당한 전방지대의 갱도추진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적들의 초토화폭격ㅡ《교살작전》에 대처한 준비이기도 했다.

김일성동지께서와 남일이 탄 차가 건지리에 도착하였을 때 저수지 앞도로에서는 호위련대군인들이 도로정리작업을 하고있었다. 삽질을 하던 군인들이 도로의 량옆으로 줄지어서는것을 보신 그이께서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손짓하시며 차에서 내리시였다.

《우린 걸읍시다.》

그이께서는 남일과 함께 저수지기슭을 따라 걸으시였다.

커다란 느티나무밑에 이르신 그이께서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아까 회의휴식시간에 하던 얘기를 마저 들어보기요. 무슨 놀음을 벌렸다고 했던가, 군사분계선설정문제를 놓고…》

긴장한 자세로 뒤따르던 남일은 그이께서 지금까지 정전담판문제를 생각하고계시였음을 알았다.

남일은 진중한 태도로 말씀드리려 했으나 그때의 정경을 되새겨보느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게 되였다.

개성에서의 정전담판은 지난해부터 공회전을 거듭하는 군사분계선설정문제와 함께 포로송환원칙문제가 초점으로 되고있었다.

엊그제 있은 소조회의에서도 포로송환원칙과 군사분계선설정문제가 론의되였는데 그때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졌다.

남일은 오늘 군사위원회의중간휴식때 앞뒤없이 번졌던 말을 더듬어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있은 소조회의에서 미국측대표는 화이즈였습니다. 그 작자는 여느때와 같이 우리측에서 내놓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제안을 반대하면서 갑자기 주머니에서 쇠돈 한잎을 꺼내더니 쌍방이 어느 한면을 선택한 다음 그걸 던진 결과를 놓고 방안을 채택하자는것이였습니다. 저희가 정한 면이 우에 있으면 자기들의 안을 채택하고 반대로 우리가 정한 면이 우에 있으면 우리의 안대로 하자는것입니다. 그래서 되게 욱박질렀습니다. 어느 뒤골목에서 하던 도박놀음을 담판장에서 하는가고…》

《놈들한테야 전쟁도 도박과 같은셈인데… 동무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김일성동지께서는 걸음을 떼며 물으시였다.

남일은 먼발치의 통신실 문전보초를 스쳐보며 소리를 낮춰 말씀드렸다.

《전 지난해의 〈하기 및 추기공세〉때처럼 적들이 또다시 새로운 공세를 준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옳소. 릿지웨이나 트루맨으로서 볼 때 지난해에 되게 얻어맞았다고 해서 주저앉을리는 만무하니까. 하지만 이제 당장은 덤벼들지 못하오.

오늘 군사위원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 적들속에서는 상층부로부터 밑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비관과 염전, 패전사상이 농후하게 나타나고있소. 여기서는 릿지웨이나 트루맨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되오. 설사 미국방성이나 도꾜사령부에서 그럴듯한 작전안을 세운다해도 그걸 실행할만한 군사적잠재력은 당장 없다고 봐야 되오.

때문에 놈들로서는 그 준비를 갖추기 위한 일이 당면과제일것이고 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것이요.

최근 적들이 벌리고있는 우리측 후방에 대한 〈교살작전〉도 이것과 련관시켜 투시해봐야 하오.

그 연장선에서 볼 때 이 〈교살작전〉은 동무의 판단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공세작전의 서막이라고 할수 있소.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기를 눌러 정전담판에서 우위를 차지해보려는 음흉한 속심인것이고 군사적측면에서 볼 때는 후방을 초토화함으로써 우리 군대와 인민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전선에 대한 물자보급원천을 없앤 다음 일격에 전선을 돌파해보려는 계책에서 나온것이라고 할수 있소.

그 공세가 언제쯤이겠는가. 말하자면… 지금까지 실패한 작전의 경험과 교훈을 참작하면서 새로 벌리려는 놈들의 공세가 어느때쯤이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가을전으로는 그런 공세를 벌릴수 없다고 보오.

이런 면에서 놈들의 그 준비시간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시간이라고 할수 있소.

전반전선을 강화하는 사업과 후방의 공고화, 특히 후방강화에 큰 힘을 넣어야 하오. 전시생산을 강화하고 인민들이 더는 피흘리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것이요.

그리고 당면하게는 동서해안지대의 방어진지를 더욱 튼튼히 하는것이요.

대통령선거를 앞둔 트루맨이나 지난해의 〈하기 및 추기공세〉실패로 인기를 잃어버린 릿지웨이로서는 뭔가 몸값을 올릴 성과가 있어야겠는데 지금 당장 노릴수 있는곳은 동해안의 원산, 통천지대와 서해안의 광량만, 온천, 서천지구요.

동무도 잘 알고있지만 적들은 이미 전쟁초기부터 이곳을 노렸거든.》

《제 생각에는 서해안방어가 걱정됩니다.

74군단의 력량이 편제보다 훨씬 부족하지 않습니까.》

《뭐 크게 걱정할건 없소. 여기서는 걱정해도 담판장에 나설 때는 잊으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남일을 보시다가 계속하시였다.

《문제는 배심이요. 한데 그 배심이란 적과 자기를 잘 알 때 생기는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동무도 잘 알수 있는 문제를 재삼 강조한것 같은데… 한마디로 적은 마지막낭떠러지에서 허우적이니만치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있다는 배심을 가지고 담판이건 싸움이건 승자의 립장에 서라는것이요.

아, 저기 리을설동무가 오는구만.》

김일성동지께서는 호위련대장겸 부관장인 리을설이 뛰여오는것을 지켜보다가 군용외투차림을 한 그의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가 된것을 알아보시고 놀랍게 물으시였다.

《을설부관장이 어찌된거요. 왜 그렇게 물자루가 됐소?》

《류경수군단장과 함께 시내에 나갔댔습니다.》

《전사의 집주소때문에?》

《그렇습니다.》

《찾았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류경수군단장동진 오후에 또 나가겠답니다.》

《그건 나에게 맡기라고 했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엊저녁 류경수에게서 관하부대의 한 전사가 자기 부모의 소식을 몰라 안타까와한다는 사연을 들으시였다.

전쟁전 38도선근처에 살던 늙은 부모들이 적의 폭격에 막내딸과 집을 잃고 평양으로 이사간 맏딸네 집으로 떠난 후 소식이 끊어졌다는것이다.

중대당세포위원장인 신기철이라는 분대장이 자기 대원의 집을 알아내려고 근 반년째 야전우편으로 편지를 띄웠으나 소식이 없어 대대에 내려왔던 류경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던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리을설을 정겹게 보시다가 남일에게 말씀하시였다.

《남일동무, 이 리을설동무가 빨찌산때의 중대장인 류경수군단장앞에서는 지금도 옴짝 못한단 말이요. 류경수만 나타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붙어다니거든. 전직관념은 좋지 않아, 하하하…

그런데 을설동무! 어제 낮에 박헌영외무상과 리승엽군사위원이 날 만나러온걸 동무가 돌려보냈다면서?…》

리을설은 별안간 몸을 옴츠리며 얼굴을 붉혔다.

《류경수군단장이… 그들의 옷차림과 태도가 정중하지 못하다고… 장화도… 그래서… 차림을 바로하라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래서야 안되지. 한데 류경수동무는 어디에 있소?》

《저수지에서 몸을 씻고있습니다.》

《류경수가 아직 팔팔하군.

부관장동무, 점심식사는 그 동무와 겸상을 하겠소.》

그이께서 집무실로 들어서시는데 대기실쪽에서 차국천장령이 황급히 뛰여나왔다.

《아니, 국천동무가 어찌된 일이요?》

《장군님께 긴급히 보고드릴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차국천은 군복매무시를 바로하며 차렷자세를 취했다.

《긴급보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의아한 기색으로 보시다가 따라오라고 하시며 집무실로 들어서시였다. 남일이 그냥 밖에서 머뭇거리는것을 보시고 그도 들어오라고 하시였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모자를 벗고 집무탁앞 걸상에 앉으시였다.

차국천은 입술을 감빨며 남일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왜? 총참모장동무가 들어서는 안될 문젠가?》

《장군님, 저 개인적문제가 돼서…  그럽니다.》

《개인문제라?!》

김일성동지께서 난처한 기색을 지으시자 남일은 소리없이 나갔다.

그런데 차국천은 남일이 나간 후에도 갑자르며 인차 말문을 열지 못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담배갑을 꺼내여 그의 앞으로 밀어놓으시였다.

《국천동무, 마음놓고 이야기하시오.

혹시 나까지 나간 다음 빈 바람벽에 대고 말하자는건 아니요?》

김일성동지께서 롱담을 하시자 차국천은 목덜미의 땀을 훔치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우리 군단장동무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여서 그럽니다.》

《박정덕이한테?!》

《예.》

차국천은 자못 괴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동무의 개인영웅심과 독단주의경향이 좀 수그러졌는가 했는데 최근에 와서 또 머리를 쳐드는것 같습니다.

젊은 간부라는데서 많은 경우 리해하려고 했지만 이제 와선 더 방관시할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요?》

김일성동지께서 엄하게 물으시자 차국천은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장군님, 제 군사위원으로서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동문 지난해 방어공사를 잘못한탓으로 군사위원회책벌을 받은 뒤부터 그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가 행동이 좀 이상스럽습니다.

장군님께서 지적하시여 해안방어축성물들을 완비해놓았는데 또 새롭게 갱도공사를 벌려놓는가하면 포도 사람도 없는 빈 갱도들에 위장을 한다 뭘한다 하면서 전사들을 들볶고있습니다. 이때문에 지휘관들속에서까지 전사들을 녹초가 되게 만든다고 의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엄중하게는… 기본력량을 평양근방에 집중배치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의견까지 무시하고 새롭게 보충되는 력량들은 거의다 평양이 아니라 해안방어부대들에 들이밀고있습니다.

또 군단장동무는 있을수 있는 비상정황에 대처하여 군단지휘부에 든든히 자리잡고있을대신 여기저기 부대들을 찾아다니며 군단지휘에 대해서는 거의나 무관심하고있습니다. 더우기 간과할수 없는것은 부대들과 진지들을 돌아볼 때 사, 려단장들까지 끌고 다니니 그들이 맡은 부대들은 머리없는 몸뚱이와 다름없이 된다는것입니다.

일부 지휘관들과 참모일군들속에서는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유람식〉이라고까지 말들 하고있습니다.

사실 저로서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 동문 평화적기분에 물젖어 토의도 없이 말을 타고 다니는가 하면…》

《잠간, 박정덕동무에게 주게 된 차는 어떻게 됐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았다?! 계속하오.》

《하여간 문제가 있습니다. 평화적기분에 대해서 말이 난김에 계속하겠습니다. 그 동문 얼마전 적들의 함정이 초도쪽으로 북상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그에 대처한 준비를 할 생각은 않고 한 녀성군관이 풍금타는데 가서 이걸 타라 저걸 타라 하며 근 한시간 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때 탄 음악이 거의 감상적인 노래들이라고 합니다.》

《감상적이라?!… 어떤 노랜데?…》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노래의 가사는 〈산에 가면 산새 물에 가면 물새-〉하는 노래인데 지금 때가 어느 때라고-》

《허허, 〈산으로 바다로 가자〉 그 노래는 리면상선생이 곡을 붙인건데 동문 그 노래를 모르오?》

《전… 노래엔 그닥 관심이 없어서…》

《그래서… 계속하오.》

《저… 식사시간도 가까왔는데 미안합니다. 저로선 그 동무의 문제를 좀 엄하게 취급하고 정신을 차리게 했으면 합니다. 그 동무의 정신상태도 문제지만 군단장의 위치에서 계속 그렇게 한다면 결국 수도방위에 치명적인 후과를 가져올것이 아니겠습니까.》

《…》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음이 무거우시였다. 조용히 담배대를 뽑아 매만지다가 도로 놓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이윽토록 밖을 내다보시였다.

갱도입구앞에 메새 두마리가 내려앉아 포르릉 거리며 무엇인가 쫏고있다. 식당의 장명선아바이가 지나다니는 자리이고보면 뭘 좀 쪼을게나 있는지…

산천이 불타니 산새들도 사람들가까이로 오는것 같다. 하긴 산새들뿐이 아니다.

얼마전에는 흔히 볼수 없는 너구리란 놈이 친위중대 개우리에 기여들어 소동을 벌린 일도 있다. 덩지 큰 순종 쎄빠트들이 처음 보는 자그마한 《괴물》앞에서 꽁지를 사타구니에 끼우고 비실비실 물러나 짖기만 하였다. 그바람에 너구리가 배포유하게 골짜기로 사라진 뒤 개들이 감때사나운 공정수한테 재벌 혼쭐이 났다. 그때 보니 너구리란 놈이 담이 컸다. 자세를 낮추고 사납게 날뛰는 개들에게 소리없이 접어드는데 기겁한 상대가 불에 덴것처럼 한길씩 뛰여오르며 컹컹 허세만 부렸다.…

우리 조국은 지금 헤아릴수 없이 큰 재난과 시련을 겪고있다. 조국산천이 참혹하게 불타고 무고한 인민들이 피흘리며 쓰러지고있다.

문득 홍명희부수상의 눈에서 번뜩이던 부시불같은것이 떠오른다. 사무친 원한, 피타는 절규…

그런데 이 차국천이는 뭐라고 했던가. 박정덕이 전사들을 들볶는다? 갱도공사를 새롭게 벌려놓는다?… 그의 말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것이 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창가에서 돌아서시며 약간 갈린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차국천동무… 동무에게 불만을 준 그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리해를 가지고 따져본적이 있습니까?…》

《예?-》

차국천이 깜짝 놀라하는 소리에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볍게 머리를 저으시였다.

《새롭게 갱도를 더 굴설하게 되는것은 작전적필요에 따른것일수 있거든. 현재 서해안방어는 요점적인 지역에는 방어력량이 강하지만 그밖의 지대에는 공백이 많소. 이것은 병력과 무장장비의 부족때문인데ㅡ 적들이 쳐들어오는 경우 우리가 주요타격지점으로 본 기본방어지대로 온다고만 볼수는 없지 않소. 때문에 불의적인 공격이 예상밖의 지점에서 강행될 때 기동할수 있는 도로가 있어야 하는것이고 싸울수 있는 갱도가 필요한것이요. 박정덕동무는 바로 그때문에 새롭게 갱도를 굴설하자고 하는것 같은데 이건 최고사령부의 작전적구상과 맞는것이요.

만약 그러한 빈 자리들에 진지를 만들지 않았다가 적들이 쳐들어오는 경우 그 희생과 후과는 무엇으로 보상하겟소?

새로 보충되는 력량을 서천을 비롯한 해안 가까운 지대로 보내는것도 마찬가지요. 우리의 원칙은 전연전방에서 적을 쳐물리치는것이니만치 서해안방위, 수도방위도 그렇소.

바다로 침입하는 적은 해안에 발붙이기전에 쳐없애야 하오.

또 서해안방어지대의 거의 전부를 맡은 군단으로서 방안에만 박혀있어서는 밑의 실태를 알수 없소. 물론 지휘관은 자기 초소를 자주 리탈하면 안되지만 전투정황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닐가?

그리고 말이요. 한 녀성군관의 음악을 듣는다는건데 나도 산에서 싸울 때 풍금같은것을 보게 되면 듣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건반도 눌러보았소. 한데 박정덕동무로 보면 감상적인지 애상적인지가 문제라고 할수 있는데 그 산으로 가자 하는 노래를 동무가 다시 들어보오. 평화로운 날의 행복한 생활을 담은 그 노래를 들으면 이 싸움을 더 잘해야겠다는 애국의 결심이 생길거요. 물론 동무로선 전투적인 노래여야 한다는 의도이겠는데 그건 옳소. 지금 우리에겐 전투적인 열정과 기백이 풍기는 전시가요들이 더욱 필요하지.

차국천동무!》

《옛.》

차국천은 벌떠덕 일어서며 차렷자세를 취했다.

《앉소. 내 말은 끝나지 않았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국천의 얼굴이 밤빛처럼 어두워진것을 보며 그한테 미안스러움을 느끼시였다.

(내가 일면적으로만 생각한것이 아닌가?)

박정덕에 대해서 다시 돌이켜보게 되시였다.

박정덕은 작전적두뇌가 명석하고 재능있는 지휘관이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앞두고 어려운 조건에서 54사를 맡았을 때 사단전투력량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면서 제2전선지역에서 본때있는 전투들을 해제겼다.

그는 말그대로 이기는 전투만을 해온 지휘관이였다.

원칙성이 강하고 군사에 밝은 그는 상대가 큰 인물이라 하여도 맹종맹동하지 않았다.

철원해방전투때 사단의 전투행동에 제동을 건 리승엽에게 권총까지 뽑아들어 소동을 일으킨 일도 있다. 전투가 승리적으로 결속되고 최현이 두둔해나서는바람에 성이 독같이 오른 전권대표(리승엽)의 분기를 눅잦힐수 있었다. 겉은 얌전해보여도 밸통이 센 지휘관이였다. 그에 대해 김책은 자주 칭찬했다. 작전적두뇌가 비상하고 전개력도 있고 혁명적원칙성이 강하다는것이였다. 자신께서 보시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었다.

그이께서는 지난해 3월 박정덕을 서해안방어를 담당한 74군단장으로 임명할 때 생각이 많으시였다. 장령급지휘관들속에서 공격형의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낸 박정덕을 전투가 치렬한 계선에서 《후방》쪽으로 돌리는것이 옳은가 하는데서였다.

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서해안방어의 허점과 앞으로의 전쟁추이를 내다보시며 그를 《종심군단》이라고 할수 있는 74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하시였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적들이 주요하게 노릴수 있다고 보신 서조선만일대에 강력한 전략적방어지대를 형성할 구상과 함께 박정덕을 군단장으로만이 아니라 전선전체를 책임질수도 있는 지휘일군으로 키우리라고 마음속에 새기고계셨다.

갓 조직된 74군단은 무장장비나 인원수가 기본 전선군단들보다 부족했다. 하지만 동부산악지대를 겨냥한 미제침략군의 공세가 치렬한 때여서 박정덕에게 인원과 무장장비를 충분히 보충해줄수 없으셨다. 그러나 박정덕은 자기 할바를 잘 알고 부대의 전투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있는것이다. 지난해말 순천에 락하한 적항공륙전대를 소멸하는 전투에서 자기 차를 태워먹은 후부터 말을 타고 군단관하를 메주밟듯 돌아치며 서천방어를 놓고 애를 태운다는 젊은 장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안겨오시였다.

그런데 차국천은 오래동안 한가마밥을 먹으면서도 그를 깊이 리해하지 못하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풀기없이 앉아있는 차국천을 보시자 별로 측은해지시였다.

《차동무, 내가 오늘 군단장을 너무 편역든것 같지 않소?》

《아, 아닙니다.》

차국천의 얼굴빛이 한결 밝아졌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저으기 마음이 가벼워지셨다.

《동무가 군사위원으로서 그를 걱정하고 또 군단의 작전행동과 관련하여 신경을 쓰는것은 좋은 일이요.

그리고 동무가 말한대로 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럴수록 동지적으로 더 따뜻이 일깨워주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면서 서로가 일심동체가 되여야 하오. 만약 군사위원과 군단장사이가 벌어지고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두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군단의 전반작전행동에 엄중한 후과를 미칠수 있지 않겠소.

내가 요즘 군단에 못나갔는데 며칠안으로 나가보겠소.》

《장군님, 장군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잘해나가겠습니다.》

《그래, 믿겠소.》

차국천이 나간 후 남일이 들어와 비준받을 문건을 꺼내 펼쳐놓았다.

그이의 가르치심에 따라 새롭게 작성한 정전협정초안 제4항에 대한 세목별 방안이였다.

1. 군사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쌍방은 각기 자기측이 수용하고있는 전쟁포로들을 석방하고 송환하는데 동의한다.

2. 쌍방은 전쟁포로전원이 송환된 후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도록 하며 전쟁행위에 더는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담보를 하는데 동의한다.

3. 쌍방은 중상자와 중병자포로들을 우선적으로 소환하는데 동의한다.

4. 쌍방은 군사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2개월내에 제3조에 의해 우선적으로 송환하게 된 포로들을 제외한 모든 포로들을 그루빠별로 나누어 송환해야 한다.

5. 쌍방은 비무장지대내의 판문점을 쌍방의 전쟁포로를 인도인수하는 지점으로 정하는데 동의한다.

6. 쌍방은 군사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즉시로 좌급군관 3명을 각각 파견하여 전쟁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하며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과 지도밑에 모든 규정들을 시행하도록 계획하여 행동하도록 하는데 동의한다.

7. 쌍방적십자단체들의 방문과 협조문제…

8. 포로들의 성명, 국적, 직급 및 해당자료들을 상대방에 넘겨주는 문제…

9. …



《남일동무, 포로송환문제에서는 단 한걸음도 양보해서는 안되겠소. 이 포로송환문제는 단순한 정전담판상의 군사실무적문제가 아니라 사람문제, 우리 공화국을 따르는 이 땅의 수많은 아들딸, 전사들의 문제라는걸 한시도 잊지 말아주시오. 그들중에는 정치공작대 등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소.

난 그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깨여나군 하오. 동무도 그들이 나에게 보내온 편지를 봤지?》

《장군님, 반드시 장군님의 뜻대로 해내겠습니다.》

남일은 눈물이 글썽하여 김일성동지께서 수표하신 문건을 받아들고 그만 떠나겠다고 하였다.

《아니, 류경수동무랑 기다리겠는데 식사를 함께 한 다음 떠나시오.》

《장군님, 방안을 제기하려면 지금 떠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 동무들과 함께 중국측의 시성문, 리극농동무들도 눈이 빠지게 저를 기다릴겁니다.》

《그럼 할수 없지. 우리 동무들과 지원군측 동무들에게 내 인사를 전해주. 시성문동문 50년 가을 대유동에서 팽덕회사령원을 만날 때 동행한 후 몇번 보지 못했소. 주은래곁에서 오래 일해놔서 견식이 있고 참 성실한 사람이요. 리극농동무도 그렇소. 그 동문 서안사변때도 담판공작을 지도했고 국공합작에도 깊이 관여해서 경험이 풍부한 동무지. 모택동동지와 주은래동지가 특별히 선발해보낸 사람들이니 그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게 잘 도와주시오.》

 

류경수와 겸상하여 수저를 드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식당밖을 내다보시였다.

《공정수동무, 고추장이 왜 없소?》

공정수가 긴장한 얼굴로 제꺽 나타났다.

《장군님, 명선아바이가 내주지 않습니다.》

《그건 왜?》

《저… 너무 귀한 고추장이다나니 장군님께서 입맛이 없으실 때만 올려야 한다고 하면서…》

《가서 전하우. 이 류경수가 빨찌산때부터 곰취를 고추장에 묻혀먹는걸 제일 좋아했다고… 그래두 안되면 내 입맛을 말하라구.》

김일성동지께서 크게 소리내여 웃으시자 류경수는 입이 함박처럼 벌어졌다.

이윽고 고추장에 싱싱한 풋고추까지 한접시 든 장명선취사원이 정중한 자세로 나타났다.

《아니, 풋고추가… 어데서 났소?》

《장군님, 아침에 허정숙문화선전상이 온실에서 키운거라며 가져온것인데 제가 식초에 씻느라고 좀 늦었습니다.》

장명선은 풋고추와 고추장종지를 밥상우에 올려놓고 위엄있게 류경수쪽으로 돌아섰다.

《군단장어른, 이 고추장의 래력을 잘 알고 자시시유. 이 고추장으로 말하면 저 홍범도의병대에 나가기전 우리 아버지가 담그어 땅에 묻었떤 장에다가 해방 이듬해 김정숙녀사께서 사창장마당에서 사온 고추가루랑 여러가지 조미료를 섞어서 손수 만드신거웨다.》

《연설이 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장명선의 요란스러운 말에 류경수앞에 풋고추접시를 밀어놓으며 짐짓 웃으시였다.

《류경수동무, 저 장동무앞에선 나도 꼼짝 못하오. 어쩌다 입맛이 써서 밥을 남겼단 큰일이요. 며칠전에도 밤을 새우며 저 저수지에 나가 물고기잡이를 해가지고 와서는 내 구미엔 아랑곳 않고 이걸 자시라 저걸 자시라 호령하는데 어찌겠소. 저 아바이한테 잘 보여야 되오. 자, 들기요.》

그런데 류경수는 고개를 짓숙인채 고추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있었다.

《왜 들지 않소?》

그이께서는 장명선이 말한 김정숙동지에 대한 이야기때문이라는것을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으시였다.

그때까지 무척 흡족한 기색으로 싱글거리던 장명선도 뭔가 느꼈는지 어줍은 태도로 주밋거리다가 슬그머니 방에서 나갔다.

《먹겠습니다.》

역시 류경수는 류경수였다. 흐려졌던 눈에 웃음을 띠우며 풋고추를 와작 씹고는 숟가락이 부러질정도로 밥을 떴다.

식사가 끝난 후 그이께서는 차국천과 만났던 집무실이 아니라 두면 벽이 작전지도로 이루어진 작전실에 들어가시여 류경수와 마주 앉으시였다.

73군단의 전반전선에서 대대적인 습격전을 벌리기 위한 토론때문이였다.

그이께서는 그곳 전선의 적들을 제압소멸함과 함께 적들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이 의연 전선동부에 지향되여있다는 인식을 주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였다.

이날 저녁에는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메말라보이던 담바우산일대가 겨울답게 다시 백설로 뒤덮어버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류경수가 탄 차가 눈길을 달리느라 굼뜨게 기우뚱거리는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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