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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360]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19-08-12
강산   35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자주시보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차례>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1896년 3월 29일 류인석 의병장이 지휘하는 항일의병 3,500명이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주둔하는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것이 항일전쟁의 시작이다. 의병운동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의병부대들의 무장투쟁은 의병운동이 아니라 항일전쟁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항일전쟁은 1896년 3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49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일왕 히로히또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던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에 종전되었지만, 조선민족의 항일전쟁은 히로히또가 항복선언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에 사실상 종전되었다.  

 

49년 동안 지속된 항일전쟁은 항일의병전쟁 → 항일독립전쟁 → 항일혁명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전쟁 제1단계에서는 항일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1년부터 1931년까지 항일전쟁 제2단계에서는 항일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32~1945년까지 항일전쟁 제3단계에서는 항일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부터 근 반세기에 걸쳐 간고한 혈전이 계속된 항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선민족의 승리로 끝났다. 항일전쟁 종전 74주년을 맞은 오늘 그 전쟁이 어떻게 종전되었는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7일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매우 특이한 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김구 임정 주석을 비롯한 임정 및 광복군 고위지휘관들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육군 소장을 비롯한 전략외사실(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고위지휘관들의 합동작전회의였다. 전략외사실은 1942년 6월 13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의 특명으로 조직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20일에 해체된 전시군사정보기관이다. 전략외사실을 모체로 하여 1947년 9월 18일에 중앙정보국(CIA)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전시군사정보기관 지휘관들이 왜 중국 시안에서 광복군 지휘관들을 만나 합동작전회의를 했을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자기의 특명으로 창설된 전략외사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전략외사실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전략외사실 무용론이 나돌게 되었다. 존폐위기에 내몰린 전략외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격전지로 떠오른 아시아전선에서 반드시 전과를 거두어야 하였다. 다급해진 전략외사실은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 공수특전대를 침투시키는 작전계획을 1945년 1월에 수립했다. 

 

그런데 조선의 언어, 지리, 풍습도 모르고, 외모도 조선인과 전혀 다르게 생긴 미국인 공수특전대원들이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대안을 모색하던 전략외사실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광복군이었다. 그때부터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시켜 식민지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전략외사실의 전략구상이 무르익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그 전략구상은 ‘독수리작전’이라는 비정규전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이른 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런 작전계획을 가지고 김구 주석을 만났다.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이 국내침투작전을 함께 수행하기로 최종 합의한 때는 1945년 4월 3일이었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1945년 8월 7일 김구 임정 주석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전략외사실 실장이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다. 김구 주석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엄항섭 임정 판공비서 겸 선전부장이고, 김구 주석과 도노반 실장 사이에 보이는 두 사람이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검은 옷)과 이범석 광복군 제2지대장(흰 옷)이다. 아래쪽 사진은 1945년 8월 4일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3지대 대원 20여 명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가운데 안경을 낀 미국인 장교가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된 20여 명 대원들에게 공수특전훈련을 시킨 클레어런스 윔스 대위이고, 그 왼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되어 공수특전훈련을 받은 20여 명 대원들 가운데는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였던 윤영무 선생(1920~2015)도 있다. 나는 윤영무 선생으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앞으로 언젠가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광복군 대원 50여 명은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전략외사실에게 위와 같은 내부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임정에게도 내부사정이 있었는데, 그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1941년 9월 17일 임정이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던 때 장졔스 정부(국민당 정부)가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했었는데, 임정은 1944년 8월에 가서야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되찾았다. 작전통제권을 되찾았으나 광복군의 무장을 허용하지 않는 장졔스 정부의 저지선을 넘지 못하는 바람에 광복군은 전투를 벌이기는커녕 총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목총훈련이나 하던 판이었다. 그런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중에 김구 주석은 식민지조선에 침투하는 비정규전에 광복군을 참가시키고 싶다는 도노반 실장의 제안을 받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김구와 도노반 앞에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이 넘을 수 없는 큰 걸림돌이 가로놓였다. 그 걸림돌은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이 종전되던 날 임정과 광복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항일전쟁이 종전되었던 74년 전, 임정과 광복군의 앞길에 걸림돌을 놓아 마지막으로 찾아온 전투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조기종전을 밀어붙인 까닭에, 임정과 광복군은 전투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1945년 8월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간 전시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기폭시험도 미처 하지 않아 터질지 안 터질지조차 알지 못하는 핵폭탄을 황급히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면 미국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소련군이 만주와 홋까이도로 남하진격하여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만약 소련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면, 미국군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기하고 하와이로 후퇴해야 하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군의 진격을 멈춰 세워보려고 날뛰었다. 당시 미국의 전략목표는 종전과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고 자기들이 먼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다급한 상황에 내몰린 미국이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황급히 선택한 것이 핵폭탄 투하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기 전인 1945년 8월 6일 우라늄핵폭탄을 서둘러 히로시마에 투하하였고, 소련이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던 1945년 8월 9일에는 플루토늄핵폭탄을 나가사끼에 투하하였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핵공격으로 24만 명을 참혹하게 살육한 전쟁범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광복군 대원들 중에서 선발된 50여 명은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광복군이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날은 1945년 8월 4일이었다. 후보생 50명 중에서 훈련 도중 12명이 탈락하는 바람에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대원은 38명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8월 7일 서안에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지휘관들,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과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침투작전을 위한 합동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은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광복군 대원들이 국내침투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또가 항복하였다.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 조선민족이 애타게 기다려온 기쁜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에게는 환희보다 실망이 앞섰다. 그가 남긴 자서전 ‘백범일지’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어도, 도노반 실장은 작전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였다. 일제가 항복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새벽 광복군 공수특전대원들을 태운 28인승 C-47 수송기 한 대가 국내침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C-47 수송기가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서해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 도노반 실장이 느닷없이 무선통신으로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였는데도 조선 점령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그가 사태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가 내린 복귀명령은 광복군의 국내침투작전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5년 8월 18일 C-47 수송기에 탑승한 광복군 대원들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제2경성비행장에 내렸으나, 비행장을 경비하던 일본군들의 감시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이튿날 중국 시안비행장으로 복귀하던 중 수송기에 비행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중국 산둥성 류팅비행장에 잠시 착륙하였을 때 촬영한 것이다. 광복군 대원들이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중국인 복장을 한 대원들과 장졔스 군대의 군복을 입은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노반 실장이 중국인으로 위장한 광복군 대원들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또 일어났다. 일제가 항복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새벽 3시 30분 광복군 대원들을 태운 C-47 수송기가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한반도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중국 대륙 상공을 가로지르며 8시간을 비행한 끝에 당일 오전 11시쯤 그 수송기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했다. 제2경성비행장은 서울 여의도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임정과 광복군이 기대했던 국내침투작전이 아니었다. 도노반 실장은 그들에게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했다면,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는, 일본군 경비망이 어느 낙하지점 상공에서 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강하하였을 것이다.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실장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기이한 명령은 도노반 실장이 그들을 대일작전에 참가시킨 것이 아니라 군사사절단으로 서울에 파견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도노반 실장이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제2경성비행장 활주로에 멈춰선 수송기의 문을 열고 내려서던 광복군 대원들은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온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광복군 대원들을 인솔한 미국군 중령 버드는 일본군에게 자신들은 군사사절단으로 왔으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일본군 지휘관은 군사사절단이 도착할 것이라는 상부의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경비병막사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보내겠다고 서울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에게 미리 통보하지 않았으므로, 제2경성비행장 경비대는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 8월의 무더위만큼 불편한 시간이 흘러갔다. 다음날 광복군 대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수송기를 타고 시안으로 돌아갔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한 전략외사실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광복군은 49년 항일전쟁이 끝나가던 종전과정에 일본군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만일 광복군 공수특전대가 전략외사실의 작전계획에 따라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비정규전을 벌였다면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조선민족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을까?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2경성비행장에 잠시 착륙했던 장준하는 대원들이 그 비행장에서 일본군과 결사전을 벌여 전사했더라면 연합국이 조선을 승전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훗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종전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꼬여가고 있었던 종전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중국 시안에서 김구 주석은 임정 주석 명의로 작성한 자신의 친서를 도노반 실장에게 건네주면서 그것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병약한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12일 병환으로 갑자기 별세하였고, 당일 부통령 트루먼은 대통령에 즉각 취임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워싱턴에 소환되는 자기 부하에게 김구 주석의 친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김구 주석의 친서는 1945년 8월 18일 백악관 비서실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 있는 임정청사에서 진행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친 직후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태극기와 장졔스 정부가 사용한 국기가 서로 엇갈려 걸려있고, 장졔스 국방부 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대원이 30여 명밖에 없었다. 장졔스는 광복군이 자기 군대 총참모장의 명령과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가져갔다. 이에 격노한 임정은 임정을 충칭에서 워싱턴으로 옮기겠다고 하면서 장졔스를 압박하여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돌려받았지만, 광복군을 유지하는 재정을 장졔스로부터 계속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 현재 임정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광복군은 339명이었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광복군은 장졔스 정부로부터 보급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대원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대원이 아닌 사람들을 명단에 끼워넣었다고 한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우리는 귀하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의 독립이 원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썼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친서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였다. 그는 도노반 실장에게 이런 회신을 보냈다.

 

“나는 1945년 8월 18일 한국임시정부 수장이라고 소개한 김구 씨의 메시지에 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자칭 정부의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본인에게 전하는 통로로 당신의 요원들이 행동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본 당신에게 사의를 표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임정과 광복군을 무시한 것은 항일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종전되었으나 조선이 승전국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임정과 광복군의 존재마저 인정받기 힘들게 되었음을 예고한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미국군이 보내준 C-47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날 임정요인들의 뒤를 따라 김포비행장에 내렸던 광복군 대원 장준하는 훗날 자서전 ‘돌베개’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시각, 자신에게 갈마든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중략)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아프도록 불러줄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소련군 81,000명이 전사하고, 나치군 100,000명이  전사한 베를린격전은 두 주간 동안 계속되었고, 1945년 5월 2일 마침내 소련군의 승리로 격전이 끝났다. 1945년 5월 8일 나치는 항복하였고, 유럽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그보다 석 달 앞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크라이미아반도 얄타에서 로저벌트 미국 대통령, 스딸린 소련 총리, 처칠 영국 수상이 정상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회의에서 스딸린 총리는 나치가 항복하여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안에 소련이 대일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공약하였다. 

 

1945년 5월 8일 나치의 항복으로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났으므로, 소련은 유럽전선에 배치했던 소련군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수송렬차편으로  10,000km 떨어진 원동전선(Far East Front)까지 실어날랐다. 세계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가장 멀리 이동하여 재배치하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동배치작전이 끝난 날은 1945년 7월 30일이었다. 

 

1945년 8월 3일 알렉싼드르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은 스딸린 총리에게 소련군의 원동전선배치가 끝났으므로,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면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소련군이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이동배치되고 있었던 1945년 7월 어느 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 청사에서 소련군 고위지휘관 전원이 참석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이 주재한 그 회의에서 대일전쟁전략이 토의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끄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1998년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1945년 여름 어느 날 대일전쟁을 앞두고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던 체험담이 상세히 수록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쏘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가보니 메레쯔꼬브와 스띠꼬브를 비롯해서 대일작전과 관련되여 있는 각 전선사령부의 책임일군들도 벌써 다 와있었습니다. 와씰렙스끼 총사령관도 거기에서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모스크바에서 쥬꼬브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독일주둔 소련점령군 총사령관과 독일관리감독리사회 쏘련측 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쥬꼬브가 무슨 일로 거기에 왔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매우 인상깊은 상봉이였습니다. 이름난 백전로장인 쥬꼬브는 대단히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사람이였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끼릴 메레쯔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었고, 테렌티 스띠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이었다.

 

광복군 통수권자인 김구 주석이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전략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인데,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는 김일성 사령관이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데는 두 가지 사연이 있었다.  

 

(1) <로동신문>은 2014년 8월 15일부와 8월 16일부에 김일성 사령관이 지휘한 반일인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인 수많은 전투들 가운데서 주요전투들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 쟈피거우전투 (1933년 3월 31일)

2. 동녕현성전투 (1933년 9월 6일~9월 7일)

3.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 (1933년 초~1934년 2월)

4. 라자구전투 (1934년 6월 26일~6월 28일)

5. 시난차전투 (1936년 7월 10일)

6. 무송현성전투 (1936년 8월 17일)

7. 만강전투 (1936년 8월 24일)

8.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9. 간삼봉전투 (1937년 6월 30일) 

10. 소사하수전투 (1937년 11월)

11. 남패자전투 (1938년 11월 중순)

12. 홍토산자전투 (1939년 1월 24일)

13. 사등방전투 (1939년 3월)

14. 13도구전투 (1939년 3월 상순)

15. 구가점전투 (1939년 4월 11일~4월 12일)

16. 올기강전투 (1939년 6월 10일)

17. 륙과송전투 (1939년 12월 17일)

18. 쟈신즈전투 (1939년 12월 24일)

19. 대마록구전투 (1940년 3월 11일)

20. 홍기하전투 (1940년 3월 25일)

21. 북2도구, 남2도구, 신성툰전투 (1940년 4월 29일)

22. 라진해방전투 (1945년 8월 12일)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는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 북부지대와 동만주에서 1932년부터 13년 동안 계속해온 항일전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30년대 후반 항일전쟁시기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것이다. 원래는 흑백사진이었는데, 조선에서 천연색 사진으로 재생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진 배경에 통나무로 만든 밀영집이 보인다. 사진에서 김일성 사령관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앉아 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용으로 안경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앞에는 나이가 매우 어려보이는 소년병이 군복을 입고 앉아있는데, 아마도 소년연락병인 듯하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되어 지하정치공작을 하는 조국광복회 성원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권총은 도이췰란드에서 생산된 마우저 C96이다. 이 권총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모젤권총이라고 불렸고, 중국인들은 싸창이라고 불렀다. 탄환이 10발 들어가는 이 권총의 유효사거리는 200m다.     


(2) 대일전쟁을 앞둔 1945년 여름 원동소련군 총사령부가 하바롭스크에 설치되었고, 와씰렙스끼가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자신이 하바롭스크에 드나들면서, 와실렙스끼 총사령관, 로디온 말리놉스끼(바이깔횡단전선군 사령관), 메레쯔꼬브(제1원동전선군 사령관), 스띠꼬브(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 니꼴라이 레베제브(제1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 와씰리 쥬꼬브(제2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를 비롯한 원동소련군 고위지휘관들과 친분관계를 맺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김일성 사령관이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메레쯔꼬브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자신과 메레쯔꼬브 사령관의 첫 상봉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메레쯔꼬브는 구면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아 흔들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리를 권하고 나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에서는 조선 동지들이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대일작전에서 조선 동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국제련합군에서의 조선 지대의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료해한 다음 나에게 조선 국내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나라에서의 일본의 군사력량배치와 통치방법,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과 혁명조직들의 분포정형, 비밀근거지들과 련결되여있는 무장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한 직후 모스크바에서 게오르기 쥬다노브를 만나 담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하여 나치의 항복을 받아내고 도이칠란드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쥬다노브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를 만났던 1945년 7월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제2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과 쥬다노브 제2비서의 담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쥬다노브 제2비서 -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 해 동안에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김일성 사령관 - “늦어도 2~3년이면 해낼 것이다.” 

쥬다노브 제2비서 - “해방 후 조선인민의 건국투쟁에 어떤 형태의 지원을 주었으면 좋겠는가?”

김일성 사령관 - “쏘련이 독일과 4년 동안 전쟁을 했고 앞으로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르어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생각한다. (중략)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쏘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쏘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리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쥬다노브 제2비서 - “당신과의 상봉결과를 쓰딸린에게 보고하겠다.”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은 제1원동전선군이 폭격기, 기갑부대, 보병부대를 총동원하여 동만주로 진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함경북도로 진격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김일성 주석이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밝힌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다.  

 

- 간백산 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한반도 북부지대로 진격한다. (간백산은 함경남도 혜산군과 함경북도 무산군에 걸쳐있는 해발고 2,164m의 높은 산이다.)

-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수송기를 타고 평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강하하여 전투에 돌입한다. (원동의 훈련기지는 당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소련군으로부터 현대전 훈련을 받은 야영학교인데,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었다.)

-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격에 합세한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같은 날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고 회고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과 경흥을 해방하였으며, 웅기에 상륙하여 웅기를 해방하고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라진은 소련군 태평양함대가 라진에 상륙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라진무장대가 해방하였고, 회령도 소련군이 공격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까치봉무장대가 해방하였다.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 당시의 협동작전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똘스찌꼬브다. 옷차림으로 보면 이 사진은 1945년 겨울에 촬영된 것 같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 경흥, 웅기,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지역무장대들, 그리고 소련군 제1원동전선군이 함경북도에 있는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고 있을 때,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공수특전대가 출전준비를 끝냈다. 공수특전대는 수송기를 타고 한반도 깊숙이 침투하여 후방교란전을 벌이라는 김일성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비행장으로 나갔다. 그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비행장으로 나간 공수특전대는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기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항일선렬들이 피흘려 싸운 1940년대 항일전쟁 중에 민족주의무장세력은 광복군으로 집결했고, 사회주의무장세력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집결했다.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정치이념도 서로 달랐지만, 항일전쟁 중에 서로 연계하려고 애썼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항일전쟁 중에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을 연계하기 위해 힘썼던 사실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병선이 주관했던 신의주의 지하조직에 관내와의 련계를 확보할 데 대한 지령을 내려보냈습니다. 그 지령에 따라 신의주의 지하조직은 천진에 있는 한 공작원에게 중경과 연안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련락통로를 개척할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중경, 연안과의 합작을 위한 중간련락거점을 만들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김구 주석도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을 연계하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는데,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의 회상에 의하면 김구도 우리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련락원은 만주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도에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1942년 12월에는 림시정부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 성을 가진 사람이 목단강까지 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일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이 연계를 맺고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웠더라면, 우리 민족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8.15 해방과 전혀 다른 8.15 해방을 맞았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강대한 민족자주역량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항일전쟁의 위대한 역사가 분단시대에 주는 통일건국운동의 제1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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